새로운 공동의 삶을 위한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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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 종교개혁 500주년에 부치며

1. 츠빙글리 종교개혁 500주년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지만, 우리 개혁(장로)교회로서는 츠빙글리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이기도 하다. 츠빙글리(1484-1531)는 1519년 1월1일 취리히 그로스뮌스터 강단에서 마태복음 연속설교를 시작함으로써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그 결을 달리하는 개혁교회 종교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어올렸다. 츠빙글리는, 자신의 신앙문제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시작하여 종교개혁에 접근했던 루터와 달리, 고통당하는 민족의 문제를 고민하며 종교개혁을 사회개혁과 연관시킨 개혁자였다. 바로 이점에서 츠빙글리는 단지 교리만이 아니라 삶 전체의 개혁을 목표로 “종교개혁의 두 번째 전환”, 곧 “종교개혁의 윤리적 전환”(K. 바르트)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리는 지난 10년 사이 칼빈 탄생 500주년(2009)과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2017)이라는 교회개혁을 위한 천금 같은 기회를 가졌었다. 여기저기서 교회 개혁에 대한 다짐과 결의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교회 개혁을 위한 노력이 성과를 얻기까지는 아직 요원한 것 같고, 교회 밖의 사람들이 교회를 대하는 시선은 여전히 냉소적이다. 그들은 개신교인들이 “이기적이고”, “물질 중심적”이며, “권위주의적”이라고 생각한다.⑴ 삶의 개혁이 절실히 요청된다. 개혁자들의 뜻과 삶과 자세를 따르기로 다짐했다면, 그들이 내렸던 결단을 우리의 것을 삼아 단호하고 분명하게 돌이킬 수 없는 운동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이것은 맘몬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삶의 태도와 자세와 행동이다. 단지 교리만이 아니라 삶 전체의 개혁을 지향했던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한다면, 이것을 한갓 마음속으로, 한갓 영적으로, 한갓 생각만이 아니라, 우리 몸 전체를 “거룩한 산 제물로”(롬 12:1) 바치며 해내야 한다.

2. 불평등한 사회와 그 사회를 빼닮은 교회

오늘의 한국은 GDP 순위로 지난 몇 년간 세계 11-13위를 오가는 경제 대국이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7번째로 1인당 국민소득 3만 불에, 인구 5,000만 명을 뜻하는 30-50클럽에 진입했다. 과거 제국주의의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 가운데 이 클럽에 가입한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적어도 국가 경제 차원에서 우리나라는 식민지와 전쟁, 가난과 독재를 극복하고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국민 모두가 함께 이룬 성장의 혜택은 국민에게 고루 돌아가지 않았다. 오늘날 한국사회를 특징짓는 말은 ‘사회양극화’ 또는 ‘격차사회’이다. 2010년대 한국의 소득 불평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최하위 수준이다. 2018년 ‘세계불평등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 가운데 네 번째로 소득불평등이 심한 것으로 나타난다. 국내소득 상위 10% 계층이 전체 소득의 43%를 점했다. 이러한 소득집중도는 칠레(54.9%), 터키(53.9%), 미국(47%)에 이어 네 번째로 높다. 이 같은 구체적인 통계수치는 오늘의 한국사회의 어두운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불평등한 현실에 대한 청년층의 불안과 절망과 분노는 ‘헬조선’이라는 울부짖음으로 터져 나오고, ‘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한 ‘3포세대’, 여기에 ‘인간관계’와 ‘내집마련’을 포기한 ‘5포세대’, 나아가 ‘N포세대’라는 말이 널리 회자되고 있다. 이 암울한 사회 한 가운데 한국교회가 존재한다.

교회는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된 사람들의 모임이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은유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 된 공동체인 교회의 모습을 잘 설명해준다. 이 교회는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대신하여 인간의 모든 죄악을 짊어지시고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신 그리스도의 화해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세상 한 가운데 존재한다. 또한 교회는 그 자체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화해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교회로 번역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가 그때까지 서로 다른 생각과 견해를 지닌 인종과 성과 계급을 망라하는 각계각층의 자유로운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한 곳에 모인 공동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밖에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서로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한 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이 공동체의 존재 자체는 그 사회 속에 있는 모든 종류의 담과 경계가 그리스도의 화해의 복음에 의하여 무너졌음을 뜻한다. 에베소서 2장은 이 사실을 장엄하게 숙고하며 교회의 합법적인 질서의 대헌장을 구성한다(2:13-22).

바울은 더 나아가서 이 화해가 세상을 위한 것임을 상기시켜준다. 고린도후서 5장 18-19절 말씀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선언한다. 이 화목, 즉 화해의 교역은 교회 내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적이며 정치적인 영역까지 그 영향을 미친다. 세상을 위한 화해의 교역은 그리스도의 화해의 빛에서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을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화해의 교역은 세상의 불의한 사고방식과 구조들을 분석하고 비판하고 바르게 재구성함으로써 실제적인 화해와 평화수립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이러한 가능성들을 세상의 모든 영역들에서 발전시키고 성취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교회는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며 세상을 위한 공동체로 세상 한 가운데 존재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화해의 교역을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벧전 2:9)이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는 명령을 받은 자들이다. 이 말씀을 들은 자들은 전적으로 그의 제자가 되지 않을 수도 있고, 전혀 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그와 동시에 맘몬을 택할 자유는 없다. 그리스도를 주라 믿는 자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것이 된 자들이다. 여기에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상의 낡은 질서와 상태를 보존하고 강화하기보다는 세상 사람들에게 낯설고 거슬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질서를 전하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사회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불의한 사회와 구조적인 악습을 타파하고 성서가 제시하는 하나님나라의 질서를 세우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교회 안에서 저 불의한 사회의 온갖 악폐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지만, 한국교회 안에서 맘몬숭배는 여러 가지의 형태로 드러나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부패시키고 있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조사한 ‘2017년 목회자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 보고서는 불의한 세상을 변혁하고 갱신해야 하는 교회가 그와 반대로 세상을 빼닮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목회자들의 평균사례비는 176만원이며, 월 사례비가 150만원 이하라고 답한 목회자가 46.5%에 달했다. 이 보고서는 성도 50명 미만 소형교회에서 시무하는 목사 중 12.1%가 ‘투잡’을 갖고 있지만, 300명 이상의 중대형 교회 목회자의 투잡 수행비율은 2.6%에 불과하다고 전한다. 지난 2012년의 보고서가 목회자 평균사례비는 213만원이며, 월 사례비 150만원 이하의 목회자는 33.8%였다고 보고했던 것에 비하면, 2017년의 보고서는 목회자들 가운데에서도 양극화 현상이 점점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⑵

세상 한 가운데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세상을 변혁하고 갱신해야 하는 교회 안에서 불의한 세상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세상의 일부가 되어버린 교회는 세상에 맞서 세상이 지금껏 듣지 못했고 알지 못했던 화해의 복음을 선포할 수 없다. 동시에,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교회로부터 특별히 새로운 것을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자신과 너무나 닮은 모습을 대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교회가 모든 사람을 연합하여 하나 되게 하는 ‘에클레시아’의 본질을 회복하고, 나아가 세상에 있는 모든 형태의 담과 장벽을 무너트리는 화해의 복음을 전하는 메신저가 될 수 있을까?

3. 기본소득의 개념과 필요성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교회가 정부와 협력하여 사회적 문제를 해결한 모범적인 사례이다. 츠빙글리는 취리히 시정부와 협력하여 전통적으로 교회가 담당하던 사회적 역할을 맡게 했다. 학교와 교육, 의료 활동, 그리고 사회복지 등이 우선적인 대상이 되었다. 수도원을 폐지하고, 정부가 그 재산을 관리하여 농민계층의 경제난을 해결하게 했다. 교회가 주관하던 빈민에 대한 자선을 제도화하여 정부 차원에서 빈민을 구제하게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운동은 “가난한 자의 미래를 열어주고, 기득권 계층의 붕괴를 막아주어, 마침내 건강한 연방공동체를 이루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⑶ 오늘의 한국교회는 어떻게 이러한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어떻게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불의한 사회와 구조악을 타개하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세워나갈 수 있을까?

K. 바르트의 제자로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 조직신학과 기독교 윤리학을 가르쳤던 한스 루(Hans Ruh)의 “기본소득” 제도에 대한 제안⑷은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교회의 개혁을 고민하는 오늘의 교회가 진지하게 검토해볼만한 매우 시의적절한 생각으로 여겨진다. 기본소득에 대한 생각은 아주 오래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이것은 토마스 모어(1478-1535)의 ‘유토피아’(1516)에서 유래했지만, 20세기 후반 들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현대의 기본소득 논의를 체계화한 학자는 벨기에 루뱅대 교수 필립 판 파레이스이다. 그는 빈곤 문제의 해법으로써 기본소득의 도입을 말할 뿐만 아니라 지속가능한 성장이 어려워진 현대사회에서 성장하지 않고도 실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기본소득을 설명한다.

한스 루는 왜 기본소득이 필요한지를 우선 몇 가지로 분석한다. 첫째, 기술도입에 의한 실업 때문이다. 우리는 디지털 혁명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의 일을 기계가 대신한다는 것을 말한다. 향후 더 많은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고, 대량실업이 발생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둘째, 소득의 불균형이다. 소득분배와 그에 따른 삶의 불균형은 잘 알려져 있다. 우리 사회에서 가난이란 절대적 빈곤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분명하게 사회적 불평등에서 비롯된 상대적 의미에서의 가난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가난하다거나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것은 한 나라의 중위균등화 소득 50-60%보다 적은 액수를 버는 것을 말한다. 셋째, 삶의 형태의 위기이다. 오늘날 인간의 실존적 삶은 늘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다. 날마다 세계의 위기상황들이 보도되고 있다. 전쟁과 삶의 터전의 파괴, 경제와 재정의 위기는 항상 예기치 못한 난민을 발생시킨다. 이러한 것은 경제적, 정치적, 기술적 지배 질서와 관계가 있다. 우리의 삶은 이러한 것들로 인해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에 노출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삶의 최소한의 부분적인 안정성을 위한 변화가 필요하며, 여기서 기본소득이 하나의 가능성으로 부각되는 것이다.

그러면 기본소득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일반적인 정의에 따르면 재정상태의 검증이나 대가없이 정치 공동체에 의하여 모든 개개인에게 지불되는 수입을 말한다. 이것을 규정하기 위해 일련의 조건과 기준들이 고려된다. 즉 기본소득은 국민경제의 재정 상태와 연관하여 정해야 하며, 해당국가에 사는 모든 국민과 체류 허가를 받은 모든 외국인들이 그 수혜자들이다. 스위스에서 ‘조건 없는 기본소득’에 대한 안건을 국민투표에 부쳤을 때, 그들이 생각한 기본소득은 월 2,500 스위스 프랑(약 280만원)이었다. 이 안건은 2016년 6월5일의 국민투표에서 찬성 23%, 반대 76.9%로 부결되었다.

최근 핀란드 정부는 2017년에서 2018년까지 세계최초로 기본소득 실험을 실시하고, 그 예비적 결과를 지난 3월 초에 발표했다. ‘고용 효과’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의 차이를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웰빙 효과’는 크게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으며, 대부분의 실험 참가자들은 매우 고무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전했다. 예비적 결과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찬성 51%, 반대 21%로 찬성이 압도적으로 높이 나왔다. 만약 최종 결과에서 긍정적인 고용 효과가 확인되면 핀란드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는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도 경기도를 비롯한 서울시에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기본소득 실험을 구상하고 실천하고 있다. 그러나 스위스 같은 사회에서 절대 다수가 기본소득 제도를 거부한 것을 보면 이 제안이 보편적으로 관철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들은 기본소득 제도를 불평등한 현상태에 대한 대안으로 여전히 심사숙고하게 한다. 첫째, 태양, 바람, 땅, 물, 천연자원 등, 우리가 거저 선물로 받은 우리 주변의 환경의 기본적 가치는 모든 사람의 것이고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든 주민을 위해 오일에 대한 배당금을 배분하는 알라스카와 금에 대한 배당금을 배분하는 몽골의 경우는 기본소득제에 대한 논의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모델이다. 둘째, 앞서 언급한 삶의 형태의 위기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사회의 우익화 현상을 가중시키기 때문이다. 빈곤을 막지 못하면, 상황은 부자들에게도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셋째, 우리 사회의 불공정한 교역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거대한 물물교환 체계 안에서 움직이며 공존한다. 여기에는 이득을 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정확하게 동일화하거나 계량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와 비슷한 것을 직업의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직업의 성과는 임금을 통해 보상될 수 있다. 그러나 임금격차의 많은 부분은 경제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 외에도 유사한 경우가 많이 있다. 사회를 위하여 더 많은 가치가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러한 가치는 정의되거나 측정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은 최소한 총체적으로 보상되어야 한다. 넷째, 노동에 종속되지 않는 기본소득제야 말로 이윤추구에만 몰두하여 우리사회를 심한 불평등에 몰아넣은 신자유주의적 경제이론에 대한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인 것보다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받아야 한다는 것은 성경의 기본 사상이고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⑸

4. 성서가 제시하는 하나님의 나라: 교회의 원형

기본소득을 위한 막대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지에 대해서는 이미 구체적인 여러 방안들이 제시되고 있다. 건강과 환경을 해치는 생산품에 대한 소비세를 증대하고, 사치품과 금융이동에 대한 세금을 증대하는 등 사회적 합의에 의해 당장 시행할 수 있는 방안들이다.⑹ 그러나, 스위스의 사례에서도 드러나듯이, 우리사회에서 공론화되고 시행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화해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고 화해의 교역을 실천해야 하는 교회공동체에서 그에 대한 논의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로 세상에 화해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고전 13:1) 같을 뿐이다. 이는 주님께서 저주하신 “회칠한 무덤”(마 23:27-28) 같은 위선적인 행태이다.

예언자 이사야가 꿈꾸는 하나님나라 비전(사 11:1-9)은 새롭게 정리되고 정돈된 창조세계의 조화롭고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의로운 왕이 통치하는 여기서는 세상에서 흔히 경험하는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이른바 ‘갑질’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로 품격과 존엄을 지니고도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들과 공존한다. 사회 속에서 가장 약한 자들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존중받으며 당당하게 그들과 함께 살아간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몽상이나 잠꼬대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를 비롯한 성서의 예언자들은 그러한 위대한 왕, 의로운 왕의 통치를 오랫동안 고대하며 그 왕이 가져올 놀라운 세계를 꿈꿔왔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왕이시라고 믿는다.

출애굽 공동체와 초대 사도교회 공동체는 이사야가 그린 조화롭고 아름다운 공동체적 비전이 단순한 소망적 사고나 감상적인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현실 삶 속에서 입증했다: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약 2리터)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그 말씀을 따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출 16:16-18).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된 것과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후 8:14-15).

이들의 공동체적 비전과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공동체를 꿈꾸게 했다. 공산주의 사상가 칼 마르크스는 “자기의 능력에 따른 사람에서 자기의 필요에 따른 사람으로!”라고 외치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획책했다. 레닌은 이 구호가 현실화될 때, 공산주의의 최종 목표가 달성되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레닌도 마르크스도 약 300년 전에 스위스의 개혁자들이 저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루어냈다는 사실은 결코 깨닫지 못했다.

복음서를 윤리사상의 토대로 삼고, 산상설교를 그 핵심 내용으로 보았던 츠빙글리는 ‘복음적 윤리’사상을 바탕으로 가난한 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이 기득권층과 공존하는 공동체를 만들어냈다. ⑺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은 고린도후서 8장 13-14절을 주석하며 그 성서의 정신을 따라 제네바 교회를 개혁했다. 칼빈은 그 주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공평과 균형이 있기를 원하신다. 사람은 아무도 너무 많이 갖거나, 필요한 것도 갖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자기 재산의 정도에 따라 궁핍한 사람을 위해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한다.”

제네바 교회는 출애굽 공동체와 사도적 교회의 정신을 따라서 교회재정을 4분할하여, 각각 교회당 보수 관리비, 목회자 생활비, 교회 안팎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금, 긴급을 요하는 이방인 난민 구제금으로 사용했다. 교회재정의 50%를 교회 안팎의 가난한 자들과 난민들을 위한 구제 기금으로 지출했던 것이다. 제네바 교회의 사례는 한국교회가 교회 안과 밖의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로 귀중한 지침과 안내가 될 수 있다. 실로 많은 교회들이 교회재정의 대부분을 교회 내적인 일들, 곧 교회당 관리비와 건축비, 사례비 등 인건비와 각 부서활동비 등에 사용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바친 헌금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사용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공평과 균형이 있기를 원하신다.” 자신의 넉넉함으로 이웃 형제의 부족함을 보충하고자 했던 초대 교회의 성도들처럼 교회들도 서로 유무상통해야 한다(참고, 행 2:44-45).

기본소득제에 대한 현대의 논의는 놀라운 예언자적 상상력을 지니고 있다. 오늘의 교회는 기본소득제에 대한 현대 사회의 이러한 논의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⑻ 또한 거꾸로 교회가 하나님 말씀의 규정대로, 제네바 교회의 모범을 따라 교회재정의 절반을 이웃의 어려운 교회를 위해, 고된 투잡을 수행해야 하는 가난한 목회자들을 위해, 교회 안팎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 기꺼이 내놓는 것으로 사회에 긍정적인 자극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교회재정의 70%이상을 선교비와 구제비로 사용하는 교회도 있다. 노회와 총회는 교회법과 규정을 면밀히 검토하고 새롭게 확정하여 이 일을 체계적이고 제도적으로 시행해야 할 것이다.

만약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의 규정대로 교회재정의 절반을, 아니 형편에 따라 최대한의 재정을 교회 안팎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 기꺼이 내놓게 된다면, 한국교회와 사회를 양극화의 위기로 내몰아가는 맘몬의 위세는 절로 꺾이게 될 것이다. 교회는 우선 이와 같은 일을 기꺼이 행해야 한다. 아울러 양극화문제의 해결을 위해 기본소득 이슈가 사회적으로 공론화되도록 촉구하고 필요한 세제 개혁, 또는 경제 정책의 개선을 요구하며 세상을 향해 외칠 때, 교회는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희망의 빛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새로운 공동의 삶’을 이끌며 하나님나라의 전위대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5. 프로페자이

마지막으로, 츠빙글리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며 그에게서 배우고 싶은 것은 ‘프로페자이’, 곧 성서연구, 설교준비 모임이다. 종교개혁에 대한 츠빙글리의 가장 중요한 공헌들 가운데 하나는 성서원어와 성서본문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강의학교’(렉토리움)을 1525년에 설립한 일이다. 후에 이곳은 고린도전서 14장26-33절에 근거하여 ‘프로페자이’(Prophezei)라고 불려졌다. 설교자는 ‘예언자적 임무’를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의도한 것이다. 이는 미래를 예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고 설득력 있게 전한다는 것이다. 강의학교는 그로스뮌스터 교회와 강 건너편에 위치한 프라우뮌스터에서 공동으로 열렸다. 이 두 교회로 금요일과 주일을 제외하고 일주일에 다섯 번씩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 가운데는 취리히의 목회자들만이 아니라, 라틴어 학교 상급반 학생들, 또한 함께 모여 성서주석을 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강의는 일정한 순서로 진행되었다. 성령의 임재를 간구하는 시작 기도 후에, 그로스뮌스터에서는 히브리어 교사가 구약성서를 주석하고, 그 다음 츠빙글리가 같은 본문을 헬라어 70인역(Septuaginta)에서 주석했다. 그 뒤에는 라틴어로 주석된 의미를 독일어로 요약하여 설교자가 회중들에게 전달하기 쉽게 해주었다. 같은 시간에 프라우뮌스터에서는 신약성서 본문들이 주석되었다. 종교개혁은 성서의 핵심적 의미를 따르는 근본적으로 성서운동이지만, 세 개의 고전어 곧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에 익숙하게 되는 교양운동이기도 했다. 이것은 특별히 취리히 종교개혁에 해당된다.

우리 주변에는 이 ‘프로페자이’를 따라 매주 일정한 날 함께 모여 성서정과에 따르는 본문을 읽고 주석하며 설교를 준비하는 목회자 모임들이 있다. 필자는 지난 칼빈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여 칼빈의 ‘제네바 목회자회’를 글이나 강연을 통해 여기저기서 소개한바 있다. 이 제네바 목회자회는 프로페자이와 달리 매주 금요일에만 모여서, 오전에는 제네바 교회에서 문제되는 신학 교리를 논하고, 오후에는 주일에 설교할 성서본문을 주석하고 함께 설교를 준비했다. 매주 다섯 번씩 모인 프로페자이와 달리 주1회 모인 제네바 목회자회가 그래도 우리 형편에 맞는 것 같아 우리도 이러한 목회자 모임을 활성화시켜보자고 외쳤던 것이다. 갈수록 교회의 상황은 어려워지고, 세상의 도전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이럴 때, 지역의 목회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신학을 논하고 성서를 주석하며 설교를 준비하는 모임이 많아진다면, 개혁자들이 원하고 걸었던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문고리를 움직이시면 문기둥도 흔들린다”(츠빙글리).

⑴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서울: 도서출판 URD, 2018), 206. 비개신교인에게 비친 한국교회의 이미지는 압도적으로 부정적이다. “이기적이다”(68.8%), “물질중심적이다”(68.5%), “권위주의적이다”(58.9%).
⑵ Ibid., 588-589. 본연구소가 2007년에 조사한 목회자 의식조사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에 따르면, 월 사례비 150만원 이하를 받는 목회자는 전체 53.2%에 달한다. 목회와신학연구소, “목회자 의식조사 보고서”(2007).
⑶ 정권모, “참을 수 없는 신학의 가벼움”, 『말씀과교회』26호(서울: 목회와신학연구소, 2000), 2-4.
⑷ 한스 루/정미현 옮김, 『기본소득, 새로운 삶의 형태를 위한 제안』(서울: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8).
⑸ Ibid., 31-42.
⑹ Ibid., 51-55.
⑺ 이재천, “츠빙글리의 복음적 사회윤리”, 『말씀과교회』26호, 151-197참고.
⑻ 이미 우리 가운데는 ‘기본소득제’를 시행하는 교회도 있다. 전주 화평교회는 교회 안에 기본소득위원회를 설치하고 ‘기본소득헌금’ 항목을 책정하였다. 매월 등록 교인의 수대로 균등하게 N분의 1로 전교인에게 현금으로 배분하고 교회 내에서, 또 교회 바깥 사회에서 사용하게 한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제102회 총회 『주제해설집』(서울: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2017),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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