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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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영 옮김

 존 칼빈은 제네바의 독재자인가?

  존 칼빈에 대한 정보는 훌드리히 츠빙글리(Huldrich Zwingli)에 대한 정보보다 더 많이 남아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츠빙글리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가졌기 때문에 이해할만한 일이다. 사실, 세계의 거의 모든 개혁교회들은 그에게 의거하고 있고 개혁교회 신자들은 자주 칼빈주의자들로 일컬어진다. 비록 그들은 자신들을 그렇게 묘사하지는 않을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칼빈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성격묘사들이 있고, 특히 독일에서 그러하다: 사람들은 그를 제네바의 독재자라고 일컫고 그의 이름에서 매우 엄격하고 그래서 그의 생각을 따르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어떤 사람을 연상한다. 그는 세르베투스(M. Servetus)를 처형하였고 “이중 예정의 교리”를 주장하였다. 그것에 따르면 하나님은 한편의 사람들은 구원에 정하고 다른 한편의 사람들은 저주 등등에 정하셨다. 1936년, 국가 사회주의 체제 동안에, 스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는 『폭력에 맞서는 양심, 칼빈에 맞서는 카스텔리오』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하였다. 여기서 그는 대단한 문학적 재능과 함께 실제로는 독재자 히틀러를 겨냥하면서 칼빈에 대해 말하였다. 이 책은 지난 몇십년 동안 칼빈의 이미지를 어둡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칼빈의 성격의 어떤 특성들이 현대인에게 낯설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그의 삶 전체를 종교개혁에 바친 수도자였고 그래서 극도로 엄격한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이미지를 파악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오늘날 칼빈에 대하여 갖고 있는 왜곡된 이미지는 20세기까지 지속되었던 교파들 간의 논쟁들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17세기에는 교파들 사이에, 특히 개혁파와 루터파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수많은 갈등들이 있었다. 수많은 중상모략들, 거짓말들 그리고 거짓된 주장들이 있었다. 부정한 일들은 모든 진영에서 저질러졌고, 거기에 개혁교회도 포함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고 칼빈주의자들보다 더 유력한 루터교도들의 수많은 저술들을 근거로 하여 칼빈에 대한 평판이 무엇보다도 독일에서 생겨났다. 몇 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 이미지는 약화된 형태로 교회사의 수많은 저서들과 대중서적들에서 살아 있고 지속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편견들에 좌우되지 않고 칼빈이 어떻게 살았고, 가르쳤으며 활동했는가를 보다 더 정확하게 바라보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칼빈의 유년시절과 학창시절

  존 칼빈은 프랑스 북쪽 지방에 위치한 노용(파리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지점)에서 1509년 7월 10일에 태어났다. 그의 실제 이름은 쟝 코뱅(Jean Cauvin)이다. 칼빈의 아버지는 노용 성당의 참사회의 공증인이었으며, 그러므로 성직자들 가운데서 평신도로서 중요한 직분을 맡고 있었다. 12살 무렵부터 존 칼빈은 성당의 수입의 일부를(제진느 제단) 그의 첫 번째 성직록으로 받았다. 1523년까지 칼빈은 고향에 있는 학교를 다녔다. 14살 되던 해 그의 부모는 그를 마튀렝 코르디에(Mathurin Cordier)가 라틴어 교수로 있던 유명한 기숙학교인 파리의 마르슈 대학에 보냈다. 코르디에는 새로운 교육학의 창설자로 유명하다. 칼빈이 코르디에에게 라틴어를 배운 기간은 매우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그의 생애 내내 그를 존경하였다: 나중에 코르디에는 제네바와 로잔의 교육기관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마르슈 대학에서 짧은 기간을 보낸 칼빈은 1524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다른 기숙학교인 몽테귀 대학으로 갔다. 로마 가톨릭 정통주의의 요새였던 그곳은 학생들이 매우 두려워하는 곳이었다. 이 나쁜 평판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거기서 생활하는 것을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철저한 교육을 즐겼던 것처럼 보이며, 특히 문법과 철학, 또한 신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선생들 가운데 한 분인 존 메이어 혹은 메이저는 복음서들에 관한 강해서를 저술했으며 위클리프(Wyclif), 후스(Hus)그리고 무엇보다도 루터(Luther)에 반대하여 로마 교리들을 옹호하였다. 루터의 교리는 이미 넓게 퍼졌고 가톨릭 교도들은 그것에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아마도 칼빈은 거기서 피터 롬바르드(약 1,100-1160)의 문장들을 기초로 교부들과 또한 어거스틴(354-430)의 가톨릭 신학을 배웠을 것이다.

  칼빈의 몇몇 친구들은 종교개혁에 공감하거나 그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칼빈 자신은 아직 그러지 않았는데, 그것은 루터와 츠빙글리의 논쟁이 그에게 너무 격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칼빈이 이 시기에 이미 루터의 저술들을 알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여튼 그는 아직 종교개혁에 가담하지 않고 로마 가톨릭 교리의 신실한 추종자로 남아 있었다. 우리는 이 시기의 칼빈을 인문학의 개혁을 주장했지만 루터적인 의미에서의 종교개혁은 주장하지 않았던 가톨릭적 인문주의자로서 묘사할 수 있다.

  1527년, 칼빈은 아직 대학에 있었지만, 그는 또 다른 성직록의 수혜자가 되었다.

  처음에 칼빈의 아버지는 그의 아들이 신학을 공부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그의 계획을 바꾸었는데, 아마도 노용 성당의 참사회와 빚은 분쟁 때문에, 또한 아마도 그가 다른 학문이 그의 아들에게 더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법학 쪽으로 방향을 잡게 하였다. 1528년에 칼빈은 당시 매우 명성이 높던 오를레앙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학구적이고 끈기 있는 학생이었다. 그는 몇 달 동안 헬라어를 배웠으며 점점 더 인문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529년에 칼빈은 오를레앙 대학을 떠났다. 그리고 유명한 법률가 알시아(Alciat)가 있는 부르즈 대학에서 그의 공부를 계속하였다.

  1531년, 그는 그의 아버지가 중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와 마지막 시간들을 함께 하기 위해 노용으로 돌아갔다. 성당 참사회와 칼빈의 아버지 사이의 다툼은 확대되어 그 결과 1529년에 그가 출교되었고, 그것은 그에게 매우 모욕적인 일이었다.

  아버지의 죽음 뒤에 칼빈은 파리로 갔다. 그는 이제 자립하였고 법학 이외에 특히 문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왕 프랑수아 Ⅰ세는 인문주의적 방향성을 띠는 대학교를 설립하였고, 칼빈은 그 대학에 등록하였다. 1531/32년 겨울에 칼빈은 세네카의 관용론« De clementia » 에 관한 주해서를 집필하였다. 이 작품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고 그를 프랑스의 가장 유력한 인문주의자들에 속하게 하였다. 이어서, 그는 오를레앙에 돌아가서 “법학사”를 취득하고 그의 법학 공부를 끝마쳤다.

  종교개혁에로의 회심

  칼빈이 언제 종교개혁에로 회심했는가를 알고자 하는 질문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연구의 주제이나, 기록에 의한 증거는 흔하지 않다. 칼빈 자신은 “갑작스러운 회심”(subita conversio)을 경험했다고 단언한다. 1557년의 시편 주석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처음에 나는 교황권의 미신에 그렇게 철저히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 진흙구덩이에서 나를 건져내기란 매우 어려웠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갑작스러운 회심으로 같은 나이에 있는 사람들보다 그런 일에 대해 더 완악했던 나를 길들였고, 나의 마음을 온순하게 하셨다. 참된 경건에 대한 지식을 얻으면서, 나는 그것에 의해 유익을 얻고자 하는 강한 욕망에 불타게 되었다. 비록 내가 다른 학문들을 포기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마지못해 공부하였다. 일 년이 채 가기도 전에, 나 자신도 초심자에 불과했는데, 참된 교리에 대한 지적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내 주위에 모여들어 배우고자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968년 칼빈 독일어판 전기에서)

  칼빈은 보다 늦은 시기에 그 날짜에 대한 언급 없이 이 글을 기록했다. 그의 회심은 아마도 1534년 5월 4일 이전에 일어났다. 왜냐하면 그 날 칼빈은 그의 성직록을 포기하기 위해 노용에 갔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가톨릭교회로부터 그의 전향의 결과로서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회심은 이미 1533년에 일어났던 것일 수도 있다. 이 가설은 만약 칼빈이 니콜라 콥(Nicolas Cop)의 강연 원고 작성에 참여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1533년 11월 1일, 칼빈이 공부했던 파리 대학교의 총장였던 의사 니콜라 콥은 마튀렝 교회에서 개학 강연을 하였다. 이 강연은 산상설교의 팔복에 대한 해설이었는데, 복음에 대한 찬양을 대표한다. 이렇게, 콥은 자신이 종교개혁에 함께 한다는 것을 선언했다. 그 교회의 프란치스코파 수도사들은 즉각 콥을 이단으로 고발했고 강연을 한지 몇 주 후에 콥은 그의 고향 바젤에서 살기 위해 파리를 떠났다. 칼빈 연구는 콥의 강연의 적어도 일부는 칼빈에 의해 작성되었는지 하는 물음에 관해서 매우 논쟁적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칼빈은 1533년 가을에 이미 종교개혁에 호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1534년 10월, 파리에서는 “벽보 사건”이 일어났다: 미사를 반박하는 글이 그 도시에 나붙었다. ‘루터교도’들이, 종교개혁적 신념을 지닌 사람들을 일컬었던, 공공의 질서와 신앙에 반하는 이 음모에 책임이 있다고 고발되었다. 이미 이 행동 이전에, 칼빈은 공개적으로 그의 복음적인 신앙을 고백하고 정력적으로 전도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마찬가지로 파리를 떠나야 했고 그의 연구를 계속 수행하기 위한 조용한 거주 장소를 찾아야 했다. 그는 프랑스어를 말하는 신자들을 위한 신앙문답을 쓰기를 원하였다. 이같이, 1535년의 처음 몇 주간을 그는 바젤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요컨대, 칼빈의 회심의 날짜를 정확하게 확정하는 일에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 가령 칼빈이 단 한 번의 사건에 대해 말할지라도, 이 회심은 또한 긴 과정의 문제일 수도 있다. 뒤 따르는 결과가 결정적인 것이다: 칼빈은 1534년 이전에 “회심”을, 곧 중요한 결과들을 낳는 복음에로의 전향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제네바에서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체류

  바젤에서 칼빈은 칼비누스(Calvinus)의 철자를 바꾸어 “루치아누스”(Lucianus)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그는 프랑스어를 말하는 개혁교회 신자들을 위해 복음적인 신앙문답을 작성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1535년 8월에, 그는 그의 작업을 끝냈는데, 그것은 1536년 3월에 출판되었다. 게다가 『기독교강요』 «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라는 제목이 붙은 이 신앙문답의 저술 이외에 그는 계속하여 성서와, 마르틴 루터의 저서들, 필립 멜랑히톤(Philippe Melanchton)과 마르틴 부처(Martin Bucer)의 저서들을 연구하였다. 좀 이후에 그는 히브리어를 배우고 스콜라학자들의 저서들을 읽었다. 칼빈에게는 집중적인 연구의 시기였다.

  1536년 4월, 그의 『기독교강요』가 출판되고 바로 칼빈은 파리에 가서 그의 형제와 자매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는 부처와 같은 신앙을 지닌 자들을 만나기 위해 스트라스부르에 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프랑수와 Ⅰ세와 칼 황제 사이에서 벌어진 새로운 전쟁 때문에 지름길로 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리용과 제네바를 거쳐 여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주목할 만한 결과를 낳았다: 제네바에서 기욤 파렐(Guillaume Farel)과 존 칼빈 사이에 유명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칼빈 자신이 전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그 때 내가 이제 조용히 은거하고자 했던 스트라스부르로 가는 지름길이 전쟁으로 인해 패쇄되었기 때문에 나는 이 제네바에서 하룻 밤 이상은 머물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려고 했었다. 이 일이 있기 바로 얼마 전에 내가 정직한 사람이라고 이전에 언급했던 (파렐)과 피에르 비레(Pierre Viret)의 노력으로 제네바에서는 교황의 추종자들이 축출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아직 안정된 상태는 아니였으며 도시의 주민들 사이에는 분쟁과 위험스러운 분열의 위기가 있었다. 그 때에 한 사람이(뒤 틸레) 나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말았다. 따라서 파렐은(그는 복음을 장려하려는 놀라운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나를 머물게 하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의 연구를 위해서 자유를 원한다는 사실을 듣고 그의 간청이 내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그는 나에게 이렇게 큰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에 내가 돕기를 거절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평안과 연구를 저주하실 것이라는 저주의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 말에 너무나 놀라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는 계획된 여행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두려움과 공포를 의식한 나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특정한 직무를 맡고자 결심하였다.” (칼빈, 시편주석 서문)

  종교개혁은 1535년에 제네바에 소개되었고 파렐은 이미 많은 일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그 도시의 의회가 주교들에 관하여 제네바 시의 독립을 역설하기 위하여 특히 종교개혁을 강제한 것이기 때문에,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내용에서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였다. 로마 가톨릭의 당원이 아직 영향을 행사하고 있었고 파렐은 혼자 그 일을 행하기에는 너무 벅차다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칼빈은 제네바에 남았다. 그런데 목사나 설교자로서가 아니라 “제네바 교회의 성경 교사”로서 남았다. 그러나 곧바로, 그는 설교자로 부름을 받았고 교회의 형성에 기여하게 된다.

  1537년 칼빈은 교회의 새로운 조직에 관하여 도시의 의회에 제안을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칼빈 신학의 근본 사상을 찾아낸다: 그의 우선적인 관심은 언제나 교회를 이루는 형식, 그것이 살아가는 양식이다. 그러나 그는 선택된 자들의 공동체를 원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재세례파의 개념이었다. 칼빈에게 이상적인 교회는 오히려 자신들의 의사로 거기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그 때문에 칼빈과 파렐은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고, “복음을 따르는 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보다는 교황의 왕국에 속하는 것을 더 원하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하여” 모든 제네바 사람들에게 서명하도록 하였다(칼빈, 시편주석 서문). 그가 도입한 다른 변화들 가운데 하나의 특징은 예배시에 시편찬송을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아직도 전세계 개혁교회를 구별하는 특징이다.

  칼빈은 신앙문답식 교육을 도입하였고 기독교강요보다 더 간결하고 분명히 루터의 짧은 신앙문답에서 영감을 받은 신앙문답을 썼다.

  그러나 의회는 개혁에 대한 칼빈의 제안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오랜 망설임 끝에 그의 제안들이 채택되었다. 그 상황은 제네바 주민들에게 신앙고백서에 서명하라고 요구했을 때 절정에 달했다. 많은 사람들이 거부하였으며 이 실패는 가톨릭교도와 개혁교도들 사이의 긴장을 증가시켰다. 이 서명을 강제한 것은 칼빈의 실수였다. 칼빈에 대한 저항이 확대되었다. 1538년 제네바에서 개최된 선거에서 로마 가톨릭적 경향을 지닌 반대당이 승리하였다. 제세례파들과의 문제는 주민들 가운데서 막연한 불안감을 가중시켰고 파렐과 칼빈에 대하여 심한 비난들이 제기되었다. 사람들은 칼빈이 아리우스주의자이고 그리스도의 신적 본성을 부인한다고 의심하였다.

  이 거짓된 비난은 그의 신학이 결코 아리우스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칼빈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이 비난들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은 베른으로 옮겨갔고, 거기서 칼빈의 견해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일은 아무런 결과도 낳지 않았지만, 제네바에서 칼빈의 입지는 이런 거짓된 주장들에 의해 약화되었다. 1538년의 선거에서 반대파는 다수당이 되었고, 제네바 의회는 칼빈과 파렐이 부활절 주일에 설교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칼빈과 파렐은 이 금지를 무시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해직되고 삼일 후에 제네바를 떠나야 했다.

  제네바에서 지냈던 기간은 다음과 같은 짧은 에피소드에 한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칼빈은 이 도시에서 겨우 2년을 머물렀을 뿐이다.

  그는 바젤로 돌아가 거기서 그의 연구를 계속 수행하기를 원하였다. 파렐은 7월부터 뉘샤텔에 부임을 했다. 칼빈의 친구들은 그의 완고함을 비난하였으며, 그래서 그는 그가 너무 완고하게 행동하였고 잘못된 방법을 택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의 공적인 활동을 중단하고 조용한 학자의 길을 택하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그는 오랫동안 프랑스의 망명자들을 위한 목사로서 스트라스부르에 가는 것을 거절한다. 그러나 마르틴 부처와 볼프강 카피토(Wolfgang Capito)가 집요하게 요청하였기 때문에, 결국 그는 그의 견해를 바꾼다. 1538년에, 스트라스부르는 독일 개신교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이 비텐베르크의 개혁에 가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처와 카피토는 신학적인 문제들에서 나름의 독자성을 지니고 있었다. 부처는 개신교 진영 가운데서 가장 영향력 있는 중재자로서 여겨졌다.

  이와 같이 칼빈은 프랑스 망명자 교회의 목사가 되고, 그 교회를 스트라스부르의 모델에 따라 세웠다. 그는 스트라스부르의 예배순서를 채택하고 그것에 단지 세부적인 것들만을 추가하였다. 게다가, 그는 최근에 설립된 대학에서 성서해석학의 교수직을 맡았다. 그는 거기서 요한복음을 해석하였고 이어 몇몇 바울의 서신들을 해석하였다. 그의 주석들이 또한 출판되었다. 그는 특히 그의 기독교강요의 새로운 판의 저술에 노력하였고, 그것이 1539년에 출판되었다. 많은 부분을 루터의 신학에 의존한 일종의 상세한 신앙문답이었던 이전의 판과는 반대로, 이 새로운 판은 독자적인 교의학의 중요한 개론서라고 할 수 있다.

  스트라스부르에 체류하는 동안, 칼빈은 매우 바쁜 시간을 보냈다. 매 주마다 그는 4차례 설교하였고, 강의를 해야 했고, 책을 저술하고 경건에 관한 대화, 이를테면 1539년 프랑크푸르트 마인에서 열렸던 것과 같은 대화에 참여하기 위하여 몇 차례 여행을 해야 했다. 이 도시에서 칼빈은 멜랑히톤을 알게 되었고, 그는 그의 친구가 되었다. 이렇게, 루터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가 칼빈과 우정을 맺었다. 칼빈은 그의 생애 내내 루터를 깊이 존경하였고, 루터 또한 칼빈에 관하여 호의적으로 말하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칼빈은 루터가 그의 노년기에 보여주었던 완고함을 받아들이는 데는 곤란해 하였다.

  칼빈에 따르면, 독일의 루터 교회는 교회의 삶에 대해서는 거의 강조하지 않고 로마 가톨릭의 예배의식과 미사에 너무 집착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지역의 영주들에 의존하는 것이 매우 문제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 동안에 스트라스부르의 상황은 칼빈에게는 유리한 것처럼 보였고, 얼마 동안, 그는 그가 정착할 주거지를 찾았다고 생각하였다. 1539년에, 그는 자신의 원대로 이 작은 공화국의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그의 책 일부를 팔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정한 기간이 지난 후에, 그의 재정 성황이 또한 호전되었다. 그의 측근들은 그가 결혼할 생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결혼시킬 생각을 하였다. 두 번의 시도가 실패하였다. 마침내 칼빈은 이들레트 드 뷔르(Idelette de Bure)와 결혼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그녀는 개종한 재세례파 사람의 과부였다. 1540년, 파렐은 결혼식의 집례하기 위하여 뉘사텔에서 왔다.

  제네바의 상황은 부정적으로 전개되었다. 파렐과 칼빈이 떠난 뒤에, 제네바 교회에는 무질서가 판을 쳤다. 칼빈의 친구들은 칼빈과 파렐의 후임자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칼빈이 중재하여 새로운 목사들을 승인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 상황은 진정되었지만,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베른은 제네바에 대한 통제권을 얻고자 하였다. 그 결과 후임자들이 시에서 축출되었다. 분규가 우려되었고, 게다가 전쟁의 조짐이 보였다. 개혁의 추종자들은 칼빈이 제네바에 즉시 귀환하는 것이 질서를 회복시키는데 필수적이라고 반대당을 설득시키는데 성공하였다. 1540년 10월 20일 제네바의 공식 대표단이 칼빈에게 제네바로 되돌아와 줄 것을 간청하는 임무를 가지고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하였다. 칼빈은 주저하였고 결국 거절하였다. 파렐도 제네바 사람들을 위해서 칼빈을 설득하려고 나섰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부처는 칼빈이 스트라스부르에 계속 남아주기를 원하였다. 칼빈을 제네바에 오게 하려는 시도는 마침내 칼빈이 제네바에 돌아가서 몇 주간 동안만 있겠다고 수락하기까지 6개월 이상 지속되었다. 1541년 9월 13일, 칼빈은 다시 제네바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의 계획과는 다르게, 그는 거기서 단지 몇 달 정도가 아니라 남은 생애 전체를 보내게 되었다.

제네바 교회의 형성

  칼빈이 제네바에 돌아온 후에 행한 첫 번째 설교는 그가 거기서 마지막으로 했던 설교를 이어가는 것이었다. 칼빈은 마치 아무런 중단도 없었던 것처럼 1538년의 그의 제네바 체류를 되살려내었다. 그러나 제네바에서 그의 지위는 사람들이 그에게 돌아와서 도시와 교회를 다시 조직해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더 확고해졌다.

  그렇지만 칼빈은 그가 가진 모든 생각을, 이를테면, 성만찬을 매 주일마다 거행하는 일 등을, 강요하지는 못하였다. 사람들은 일 년에 네 차례 성만찬을 거행하는 베른의 관습을 채택하였다.

  또 다른 문제들이 마찬가지로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 칼빈은 교회의 훈련을 도입하고 그것을 실행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당회가 죄를 범하였거나 정통교리를 어긴 교인들을 소환하여 신문하고, 책벌하고, 필요하다면 출교까지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시의회는 정부의 공식적인 사법권과 유사한 권한을 행사하는 재판권을 두려워하여 이 생각에 반대하였다. 오랜 토론 끝에, 칼빈은 그의 생각을 관철시켰지만, 당장에 시행된 것은 아니고, 1555년에서야 완전히 시행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의 훈련이라는 개념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칼빈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그는 신념을 확신하는 교회는 그의 지체들이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 이 사람들이 교회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있는지 어떤지를 토론할 수 있기 위하여 그 구성원들의 품행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게다가, 칼빈은 이점에 관해서 잘못을 저지른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다루는 문제에 대하여 말하는 마태복음 18장의 안내와 지지를 받는다고 느꼈다.

  교회 훈련의 문제는 제네바 의회와의 사이에서 대부분의 갈등을 빚어냈다. 그러나 교회의 질서의 측면에서는, 교회 자체가 지도하고 조직하는 그 방식은 보다 중요하였다. 그리고 칼빈 때문에 네 개의 직무들이 교회의 삶에서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교회의 직책은 네 가지 직무들로 구성된다: 목사, 교사, 장로와 집사.

  1. 목사는 설교하고 가르치고, 행정을 담당하고 성례전(세례와 성만찬)을 거행하며 병자들을 심방해야한다. 일주일에 한번, 그 지역의 목사들은 모임을 갖고 함께 성서를 해석하고 서로 평가받아야 한다.

  2. 교사들은 “신자들에게 구원의 교리를 가르치는” 임무를 맡았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은 구약과 신약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 강의들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언어의 지식과 일반적인 교육이 필수적이며, 그 교과의 교육이 또한 교사들의 임무에 속한다.

  3. 매해마다, 12명의 장로들이 두 개의 의회에 의해서 선출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동료들에 의해 선출된 여섯 명의 목사들과 함께 당회를 구성한다.

  이 당회는 교회의 구성원들에게서 교회의 법이 지켜지는지를 감독할 임무를 갖는다. 당회와 당회원들은 “악하거나 무질서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친절하게 훈계”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회원들은 교인들의 품행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또한 그들이 예배와 교육에 참여하는지에 대해서도 똑같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만약 그들이 수치스럽거나 잘못된 행동을 발견한다면, 그들은 우선 친절하게 관련된 자들을 훈계해야 한다. 만약 이것이 충분하지 않다면, 당회는 출교나 세속의 법정에 호소하는 등의 처벌을 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처벌은 매우 드물게 시행되었다. 당회의 주된 활동은 부부들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갈등을 중재하는 일이다. 당회는 매주 한 차례씩 목요일에 모였다. 교회법은 당회가 그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행동해야 한다는 정신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 모든 조항들은 언제나 너무 가혹한 짐이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시행되어야 한다. 훈계조차도 죄인들을 우리 주님께 인도하기 위한 ‘약’에 불과할 뿐이다.”

  당회는 세속적인 권력의 영역이나 당국의 사법권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4. 집사는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병자들을 보살피는 두 가지 임무를 갖고 있다. 첫 번째 임무는 구호금을 모으고, 그것을 궁핍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에게 먹을거리를 가져다주는 일이다. 두 번째 임무는 진료소와 외인들을 위한 여관을 운영하는 일이다. 가난한 자들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서 진료소에서 일하는 교사의 치료비는 무료이다. (교회법에서 인용)

  물론, 지역의 모든 교회에는 수행되어야 하는 일정한 직무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교육과 양성의 영역에 속하고, 다른 이들은 집사의 차원과 관련되어 있다. 교회 안의 직무들은 그들의 임무에 의해서, 다시 말하면 기능적으로 정해졌다. 이 기능적인 정의는 칼빈의 개념을 교회의 직무에 대한 모든 성례전적인 정의들과 구별이 되게 한다. 이것은 어떤 직무를 맡은 사람이 그 기능을 행사하는 한 그 직무를 갖는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그 직무는 개인이 아니라 교회에 매여 있다. 이점에서 루터의 가르침과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 루터는 안수례에 매여 있고, 교회가 아니라 개인에게 매여 있는, 설교와 성례전을 거행하는 유일한 직무에 집중한다.

  제네바에서의 활동 외에도, 칼빈은 서로 다른 개신교 운동들을 하나가 되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성만찬에 관하여, 그는 1549년에 취리히 시와 이른바 “티구리누스 합의”라는 일치를 이루어냈다. 바로 저 확고한 토대 위에서 일종의 “성만찬에 대한 개혁교회적 이해”가 생겨났다.

칼빈 생애의 말년

  1549년에는 칼빈의 아내가 죽었다. 그들의 유일한 아들은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1559년에 칼빈은 제네바에 헬라어, 히브리어 그리고 철학 등 세 개의 강좌가 있는 대학을 세웠다. 그 대학은 종교개혁에 가담하고 이어서 각자 자신들의 나라에서 개혁자들이 된 수많은 신학자들의 교육의 장소였다. 이 학교의 영향력은 과대평가될 수 없다.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John Knox)는 많은 나라들로부터 왔던 수많은 학생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 대학은 칼빈의 활동의 정점으로 간주할 수 있다: 여기서 성서 해석이 -칼빈의 중심적인 생각- 체계적인 방식으로 수행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에, 『기독교강요』 마지막 판이 출간되었다. 그것은 4권의 책과 24장으로 구성된 두꺼운 교재이며 개신교 신학의 가장 위대한 교의학 저서들의 일부이다.

  아마 그의 일생 내내 지속되었던 엄청난 일 때문에, 칼빈은 수없이 많은 질병으로 고통을 겪었으며, 점차 쇠약해져 갔다. 1564년 2월 2일에, 그는 대학에서 마지막 강연을 하였고 2월 6일에는 그의 마지막 설교를 하였다. 1564년 5월 27일, 칼빈은 제네바에서 죽었다. 5월 28일에, 그는 성대한 의식 없이 매장되었다. 그리고 그가 바라던 바대로 그의 무덤은 어떠한 묘석으로도 꾸며지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 어느 누구도 칼빈이 어디에 묻혔는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1564년 2월 28일의 그의 고별사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나는 많은 결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참아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했던 모든 것은 내세울 만한 것이 하나도 없기까지 합니다. 악한 사람들은 또 이 말들을 이용하겠지요. 그러나 나는 내가 한 모든 일은 아무런 가치도 없고, 또 나는 비참한 피조물이라는 것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나는 선을 행하길 원하였고, 나의 잘못이 언제나 나를 역겹게 했으며,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나의 마음 가운데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내가 언제나 선한 일을 행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은 여러분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내가 저지른 잘못을 용서해주시라는 부탁을 드립니다. 그러나 선한 어떤 것이 있었다면, 그때 그것을 하나의 본보기로 삼고 똑같이 행하십시요!”

  칼빈은 본래 프랑스인이었고 그의 생애 내내 프랑스를 향해 방향을 잡고 있었다. 그는 박해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프랑스의 교회들이 강해지기를 원하였다. 그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그의 삶의 주된 목표였다. 그는 공통의 하나의 교리와 하나의 교회법으로 개혁교회들을 하나가 되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는 너무 일찍 죽어서 종교전쟁의 때에 프랑스의 교회들을 도와주고 지지할 수 없었다.

  그가 유럽 전체와 나눈 서신은 인상적이다. 대략 2,000통의 편지들이 보존되어 있다. 이 편지들에는 그가 유력한 정치인들에게 보낸 편지들뿐만 아니라 스위스 연방 내와 밖에 있는 다른 개혁자들에게 보낸 편지들이 있다. 많은 편지들이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의 상황을 다루지만, 또한 다른 문제들도 다루고 있다. 그 외에도, 거기에는 또한 칼빈을 가장 평범한 신자들에게조차 그들이 그들의 신앙과 삶에 관하여 질문하는 것들에 유익하고 심오한 조언을 해줄 줄 아는 영혼의 목사로서 묘사하는 수많은 증거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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