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적으로 장로교인들은 웨슬레파, 침례교 그리고 오순절파 교인들과는 달리 성령의 사역과 은사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특히 성령의 은사와 관계된 것으로 보이는 거의 모든 것, 곧 경건한 삶, 복음 전도의 열정, 엑스타시적 체험, 회심, 자발적 혹은 자연스런 간증, 방언, 기적적인 치유 등은 장로교회에서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다.
그러나 장로교인들이 처음부터 뜨거운 열심과 경건, 자발성을 지닌 저 다른 교파 신자들과 달리 차갑고, 또 머리로만 믿는 자들은 아니었다. 개혁교회 전통은 칼뱅 시대로부터 성령 교리에 특별히 주목해왔고, 칼뱅은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를 강조하면서 우리의 전 존재가 성령의 은혜로운 사역의 결과라는 사실을 『기독교강요』 제3권 ‘성령론’에서 놀라운 필치로 드러냈다. 이와 관련하여 현대의 주도적인 신학자들은 주저하지 않고 칼뱅을 “성령의 신학자”라고 부른다.
물론, 츠빙글리, 칼뱅, 낙스와 같은 개혁파 개혁자들은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특히 칼뱅은 이른바 예언, 병고침, 방언과 같은 성령의 “특이한” 은사들은 일시적인 것이며 길게 논할 가치가 없다고 보았다(Inst. Ⅳ.iii.8). 그러나 최근에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개혁자들의 무관심은 그것들을 과소평가하거나 혐오해서가 아니라 재세례파와 보다 더 과격한 개혁자들의 광기에 가까운 열심에 대한 반작용 혹은 반대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어쨌든 종교개혁 이후 개혁교회 진영에서 성령의 은사들은 사도 시대를 끝으로 중단되었다는 생각은 하나의 교의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소홀히 여기고 의심쩍어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학 모두에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성령의 역사가 무시되거나 억눌릴 때,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위계적이고 강압적인 것으로 이해되기 쉽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은 그리스도 유일론으로 타락하며, 성서의 권위는 타율적이 되고, 성례전은 성직자 중심의 통제 아래 놓이는 거의 마술적인 의식으로 격하된다.
그러나 지난 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전 교회적으로 성령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사실이다. 이러한 발전에 공헌한 많은 요소들이 있는데, 그중 가장 특기할 만한 것들을 들자면, 역사적으로 성령을 대단히 강조해 온 오순절 교회들의 놀라울 정도의 확산과, 성령에 대한 서방교회의 신학은 결점이 있다고 수세기 동안 주장해온 동방 정교회들의 늘어나는 영향력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미와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서의 그리스도교 기초공동체들의 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개혁교회가 칼뱅의 영향으로 성령과 성령 안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크게 강조하였지만,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교회 전통들도 자주 성령의 사역의 다른 측면들에 대해서는 거의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교리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서로에게서 배울 필요가 있다. 어느 특정 교파가 성령을 독차지 할 수는 없다. 우리는 다만 다음과 같은 고대의 기도문을 반복할 수 있을 뿐이다. “오소서 창조자 성령이여!”(Veni Creator Spiritus!)
위격으로서 성령의 지위와, 영원한 삼위일체의 삶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성령의 관계, 그리고 성령 안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고전 신학에서의 방대한 논쟁들과 비교해 볼 때, 이 세상에서 그리고 특히 인간 삶의 변화에 관한 성령의 사역에 대한 교리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발전이 억제되었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다차원적인 묘사를 제공한다.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
성령의 사역에 대해 말할 때, 가장 먼저 말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혜택에 관한 명증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 곁에, 혹은 그 위에, 그의 나라와 그의 말씀과 다른 자연적이나 혹은 초자연적인 영역에 있는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다. 성령은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준다(요 16:13). 성령은 신자들과 그리스도를 연합시키며, ‘그때 그곳’과 ‘지금 여기’ 사이를 이어준다.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성서에서 증언되고 교회에서 선포된 그리스도는 우리 밖에 있는 단순한 대상, 또는 공간과 시간의 넓고 깊은 도랑에 의해 분리되는 과거의 인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오래 전에 이미 떠나 버린 사람, 혹은 미래에 올 사람에 대한 단순한 기억이나 상상 속의 인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칼뱅이 말한 것처럼,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유익을 즐기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마치 띠처럼 사용하시어 우리를 자신과 연결시키시기 때문이다(Inst.Ⅲ.i.1).
2. 새로운 삶의 창조
성령은 새로운 창조를 일으킨다. 하나님이신 그분과 우리의 접촉은 완전한 변화를 의미한다. 성령이 계신 그곳에서, 우리는 여전히 있는 그대로 존속할 수 없다. 성령은 우리를 공격하고, 우리를 다시 살리기 위하여 우리를 죽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것은 끊임없는 죽음의 과정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이 “옛” 사람은 언제나 또 다시 이전으로 되돌아가려고 하고 그래서 언제나 또 다시 물에 빠뜨려 죽이기 위하여 세례의 물의 표면 아래 놓일 필요가 있는 어리석은 자이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출생은 유일회적으로 완성된 사실이 아니다. 가장 위대한 성자도 여전히 완전한 거듭남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시간 속에 있는 우리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한의 신학에 따르면, 성령은 우리가 중생하도록 돕는 대행자이다. 바울은 성령을 생명을 주는 영(고후 3:6)이라 칭했는데, 그것은 성령이 옛 인간을 세상의 파멸의 세력들, 즉 죄, 죽이는 문자, 자기추구, 죽음 등의 세력들로부터 해방시켜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인간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갈 5:22). 성령을 통해서 인간은 노예상태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을 자기의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갈 4:6). 이같이 성령에게서 새로운 삶을 허락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의를 말할 수 있게 되고, 창조의 회복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동역자(고전 3:9)로서 행할 수 있다. 성령에 의하여 주어진 제자들의 새로운 언어 능력은 사도행전 2장에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성령에 충만한 사람들이 행하는 새로운 능력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서로 섬기도록 준비시키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바울의 진술에서 강조된다. 그러므로 개혁교회 전통에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공동의 복지를 위하여 봉사하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창조적이며 구속적인 사역의 동반자들로 여겨진다.
3. 하나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
바울은 주의 성령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다(고후 3:17)고 증언했다. 구약성서는 성령을 불의에 저항하도록 힘을 주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분으로 묘사한다(사 42:1이하, 61:1이하 참고). 신약성서는 성령의 오심을 속박으로부터 삶의 해방과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새로운 자유와 연관시킨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본질적으로 해방적인 것이었다면(갈 5:1), 성령의 활동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시작된 사역의 연속이다. 이렇게 성령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며 새롭고 풍성한 삶을 살도록 자유를 가져다주신다. 성령의 해방시키는 사역은 인간의 삶 속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의 자유 안에 참여하고자 신음하며 갈망하는 창조 전체를 통하여 나타난다(롬 8:21).
그런데 하나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의 관계 문제는 교회사 속에서 많은 논란을 발생시켰다. 이 주제는 멀리로는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사이에서, 종교개혁 이후에는 개혁교회 내에서, 무엇보다도 개혁교회와 다른 교회들 사이에서 활발히 논쟁되어 왔던 문제이다. 확실히 인간의 자유가 있고, 인간 스스로 어떤 행위들을 경험하고 실행할 가능성이 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우리는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고, 신학조차도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인간 안에 있는 인간적인 요소를 삭제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관한 한 이 요소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에 근거를 줄 수도 없다는 것을 안다. 예컨대, 천사가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을 때 그 속에 맨 먼저 들어간 사람만 낫게 된다는 베드자다 연못에 갔던 중풍병자에 대한 이야기(요 5:1-9)를 생각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들이 원할 때 그 못에 들어갈 수 있지만, 그러나 언제나 적절한 때는 아니었다. 하나님의 현실적인 개입이 요구된다. 인간은 그가 원할 때 행동하지만, 그의 행동은 다만 그 행동이 하나님의 행동과 상응할 때만 의미를 얻는다. 정말, 하나님의 바로 그 행동에서, 그것은 여전히 인간의 문제, 그의 자유의 문제, 그의 생명의 문제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간의 문제이다.
4. 새로운 공동체
성령이 삼위일체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사랑과 우정의 결속이듯이, 그것은 또한 우리를 그리스도와 우리의 이웃과 연합시키는 능력이다. 그러나 성령의 연합시키는 능력을 통하여 단순히 모두가 같은 마음을 갖게 되거나, 같은 가족, 같은 인종, 같은 경제적 계급, 혹은 같은 민족과 같은 친족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방인과 더 나아가 이전의 원수까지도 연합시키는 새로운 공동체의 능력이다.
교회를 뜻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Ekklesia)는 구약의 ‘카알’(Kahal), 즉 ‘하나님 백성의 모임’을 번역한 말이다. 그 모임은 부름을 받은 무리, 세계로부터 성령의 부름에 응답하여 모이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신약성서에서 이 개념은 일정하고 제한적인 ‘장소’와 이 구체적인 장소에 존재하는 아주 구체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임’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데 칼 바르트는 ‘에클레시아’가 메신저의 외치는 소리나 트럼펫 소리를 듣고 사방에서 몰려든 사람들을 말한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둔다. 바르트는 칼뱅이 ‘에클레시아’를 군대(compagnie)라고 부른 것은 이런 모임을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부름을 받고, 그 부름에 응답한 자들의 군대, 곧 신자들의 군대이다. 그들을 소집한 분은 하나님이신 성령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연적이거나 역사적인 인간의 결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견해를 갖고 그때까지 서로 흩어져 있던 개인들을 ‘함께 부르시는’(convocatio) 성령 하나님에 의해 존재한다. 이같이 교회는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인간적인 집회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그들의 의견대로 서로 흩어져 있던 개인들을 하나의 단체로 구성하는 하나님의 소집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여기에는 인종, 민족, 성, 계급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이렇게 성령은 이전에 극복할 수 없던 장애물들이 있었던 곳에 공동체를 창조한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이러한 성서의 증언들은 인간을 자기 폐쇄성에서 해방하여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하는 성령의 특수한 활동을 말한다.
5. 종말에 대한 희망적 기대
또 하나 매우 중요한 것은 성령의 사역이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와 약속과 관계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은 첫 열매(롬 8:23), 혹은 하나님이 가져오시는 미래에 대한 “보증”(고후 1:22; 5:5)으로 말해진다. 하나님의 약속된 미래에 대한 능력으로서 성령은 하나님의 구속적인 사역의 완성과 모든 창조세계 안에서 정의와 평화의 수립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일깨운다. 성령은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우리 안에서, 그리고 모든 피조물 안에서 탄식한다(롬 8:26). 성령은 세계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교회로 하여금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알게 할 뿐만 아니라 중립적 태도에서 깨워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해 말과 함께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적인 힘이시다. 성령은 희망을 살아 있게 하며,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에 대해서 신선한 비전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비전 혹은 희망이 없는 곳에는, 그리고 현재의 불의와 악에 대하여 만족하거나 항거하지 않는 곳에는, 확실히 이러한 용어에 대한 성서적인 이해에서 볼 때, 성령은 현존하지 않는다.
6. 성령세례
성령세례는 여전히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문제이다. 개혁교회는 중생체험을 성령세례와 동일시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은 성령세례를 신자가 될 때 이루어지는 것, 곧 중생과는 구분되는 하나의 체험으로 본다. 오순절 교회에 의하면, 두 성령세례가 신자들에게 모두 정상적인 것이 된다. 첫 번째 세례는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을 때에 이루어지며, 두 번째의 성령세례는 방언 등을 포함하는 ‘영적 은사’들을 누리게 되는 충만한 영적 체험이라는 것이다. 오순절파들에 의하면 방언은 곧 성령세례를 확증하는 표식이다.
개혁교회 신학자들은 제2차적 경험으로 주어지는 성령세례는 결코 신약성서에서 발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세례를 하나님께서 신자의 삶 속에 성령을 부어주시는 표식과 ‘인치심’으로 보아왔다. 믿음과 회개는 성령의 역사의 진정성의 표식이고 세례의 예식은 외적인 표현으로 본 것이다. 외적인 ‘표지’(물)와 내적 실체(하나님의 성령의 선물)는 세례의 예식에서 연합된다. 개혁교회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성령에 충만해야 하고, 오직 하나의 세례(엡 4:5)가 있을 뿐이며, 신자가 되는 것과 동일시되는 성령의 은사도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개혁교회적 관점에서 성령세례는 신자들이 세례를 받을 때 발생하는 일의 실재를 증거하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7.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
개혁교회가 칼뱅의 영향으로 성령과 성령 안에서의 삶을 크게 강조했지만,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개혁교회는 성령의 은사들을 전적으로 무시하거나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성령에 의해 주어지는 ‘자유’(고후 3:17)에 열중했던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과는 달리 전통적으로 ‘질서’(고전 14:40)에 호소해왔다. 개혁교회는 사도 바울의 권면대로 성령의 은사들이 공동체 안에서 “품위 있고 질서 있게” 사용되기를 원한다.
참으로 성령께서는 교회와 교인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 수행될 수 있게 하신다(고전 2:12, 12:1, 히 2:4). 이 성령의 은사들은 몇 가지로 획일화할 수 없는 광범위한 다양성으로 특징된다(롬 12:3-8). 이 모든 것은 같은 성령으로부터 오며(고전 12:4-11), 교회의 ‘유익’이라는 목적을 향해 있다(고전 12:7). 교회 구성원들은 서로에게 주어진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을 통해 교회의 사역의 파노라마를 실행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사실을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한다. 그들은 목사로부터 평신도에 이르는 모든 회중이 각자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은혜를 따라, 은사 시행이 요구되는 교회를 통하여 회중 전체의 덕을 위해 일할 수 있으며, 또한 개별적인 은사들의 회중적 실시를 통하여 회중 가운데서 신자들의 사제직이 활성화되고 초대교회에서처럼 신자들의 집단적인 친교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 되는 체험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오순절주의에 대한 뉴비긴 감독의 평가는 주목할 만하다. “각 구성원이 성령께서 주신 은사들을 가지고 전체의 삶에 공헌할 기회를 갖는 그러한 참 회중적 생활은 목회나 성례전만큼 교회의 본질에 해당된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을 전체 회중 가운데서 드러나게 하면서(오순절주의적 강조) 또한 바울이 권면하는 바와 같이 어떻게 그 은사들을 공동체 안에서 “품위 있고 질서 있게” 사용할 수 있는가(개혁교회적 강조) 하는 데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 “사랑을 추구하라”(고전 14:1), 그리고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영적으로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고 계속하여 권면한다. 성령에 의해 주어지는 은사들은 받은 사람에게 명예와 영광을 가져다주기 위한 것이 아니고,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고 그를 섬기는데 사용되도록 정해져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바울은 교회의 삶 속에서 성령의 은사들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은사들로부터 그 열매들(갈 5:22-23)에로 그의 강조점을 이동시킨다. 또한 바울은 다른 교회들과 서신교환을 할 때는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난 특별한 종류의 은사들을 언급하지 않았다. 성령께서 참으로 경이로움의 근원이 되시지만, 바울이 보기에 참으로 가장 경이로운 것은 그가 성령의 열매들로 묘사하고 있는 저 특성들을 반영하고 있는 그 같은 삶, 곧 성화된 삶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성령의 은사들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그 은사들로부터 그 열매에로 강조점을 이동시킬 수 있을까? 오순절파 목사 칼 엑케가 독일 개신교회를 생각하며 한 다음과 같은 말은 이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단서를 제공해준다. 그는 사도 바울에 대해 말하면서 “바울도 아마 믿음에 의한 칭의가 복음주의적 강단에서부터 아주 분명하게 울리고 있다는 것을 즉시 인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도나 예배에 있어서의 교회의 침묵이 그만큼 그를 화나게 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칭의의 복음에 대한 설교가 은사들의 회중적 실시를 가능하게 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칭의의 복음은 그리스도교 구원론의 핵심을 담고 있고, 신자들은 이 사실을 단순히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만으로 놀라운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화해사역의 단지 한 측면에 불과할 뿐이다.
성서는 두 가지의 단계적인 자유를 증언한다. 자유의 첫 단계는 ~로부터(out of)의 자유이고, 두 번째 단계의 자유는 ~에로의(into) 자유, 혹은 ~을 향한(for) 자유이다(Exodus out of Egypt; Exodus into Canaan). 예컨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셨을 때, 그 해방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로 인도하여 그곳에서 그들이 새로운 미래와 역사를 이루게 하시려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처럼, 출애굽 사건은 이 자유의 두 단계를 모두 예시해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켜 새로운 미래와 역사를 위해 가나안에로 이끄셨다.
신약은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자유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유롭게 된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죽음과 악의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자유함을 누리게 된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억압하거나 강제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죄도 죽음도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속박하지 못한다. 우리는 진정 자유로운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상태에서 해방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속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명하셨다. 애굽에서부터의 해방, 죽음과 악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누리는 자유함의 첫 단계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첫 단계의 자유함, 궁극적인 해방의 경험이 없다면, 두 번째 단계의 자유함, 곧 ~을 위한, 향한 혹은 ~에로의 자유는 결코 누리지 못한다. 세계와 이웃을 향한 책임과 의무를 동반하는 이 자유, 곧 성화된 삶은 첫 단계의 자유함을 제대로 향유한 자, 경험한 자들만이 누리게 되는 자유함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일에서 이 첫 단계의 자유를 경험하지 못한 자는 단지 율법적, 당위적인 이유로 마지못해서 섬김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 섬김은 마치 돌짝 밭이나 가시밭에 뿌려진 씨앗과 같이 오래가지 못하고 쉽게 시들고 말 것이다. 그에 반하여 첫 번째 자유함을, 달리 말하여 칭의의 복음의 맛을 제대로 맛본 사람은 자연스럽게, 기꺼이 자발적으로 두 번째 단계의 자유함으로 넘어간다. 그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만끽하며 이 험난한 세상을 힘차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가 설교 강단에서 아주 분명하게 울리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 주변에서 성령의 열매가 분명하게 보일 것이다. 성령의 은사에 대한 오순절주의적 강조는 성령의 열매에 대한 개혁교회적 강조로 나타나야 한다. 이러한 관점은 은사를 감사로 여길 뿐 아니라, 은사가 그리스도를 섬기는 더 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게 해 준다. 이것이 바울이 증언하는 성령의 은사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이같이 그리스도인들은 몇 가지의 특별한 영적 은사, 예컨대 치유, 방언, 예언의 은사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성령의 열매”(갈 5:22-25)로 표현될 수 있는 성품과 더불어 우리에게 주어진 다양한 은사들(재능, 능력, 기술 등)을 활용할 수 있는 ‘소명’ 또는 활동들이 있다. 우리가 가진 이 다양한 은사들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것들이다(고전 12:11).
성령은 임마누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믿고 감사하며 소망 가운데 책임적으로 살아가는 자유인이 되는 것은 우리의 영이나 정신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자유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이다(고후 3:17). 다시 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은사이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단지 교회 안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그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부는 바람처럼 교회 울타리를 넘어서 이 세계 전체에서 역사하신다. 우리는 이 세계 도처에서,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좋은 소식’을 듣게 되고, 특정 세력에 포로가 된 사람들(예컨대, 온갖 중독)이 자유를 얻고, 보지 못하는 사람들(그것이 어떤 의미든지)이 시력을 회복하며, 억압받는 사람들이 자유를 얻는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자유롭게 하시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미 자신의 고향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 참석하셨을 때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사 61:1-2)을 통해서 이 사실을 천명하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여기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역이 예고되어 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서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다. 성령은 낡은 것을 새 것과, 과거의 것을 미래의 것과, 다양한 것을 통일적인 것과, 개인의 자유와 발전을 교회 전체를 위한 책임성과 결합시키는 능력이시다. 그는 또한 어떠한 제약과 틀도 깨뜨릴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시다. 그렇다면 그 능력은 예수께서 이러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시작하셨던 해방의 사업을 오늘 지속시킬 수 있기 위해서 진정 우리가 필요로 하는 능력이심이 분명하다. 오소서, 창조주 성령이시어! 우리를 충만히 채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