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신학 단상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에 대하여(눅 4:1-13)
최 영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한 이는,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예수님 위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던 바로 그 성령이다. 성령이 그를 광야로 이끌었던 것은 그곳이 집중과 명상 그리고 기도하기 좋은 장소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그가 시험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다(마 4:1). 옛 생각에 따르면, 광야는 바다와 같이 지하세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장소, 특별한 의미에서 마귀에게 속한 장소였다. 바로 그 마귀와 만나려고 예수님은 거기에 가셨고 거기서 금식할 예정이었다. 그는 앞으로도 자주 마귀를 만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길은 어둠의 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길이 아니라 언제나 그 접경을 따라가는 길이고, 결국 그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처음부터 그의 길은 마귀와 대결하고 논쟁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 어둠의 나라의 시험에 전혀 상처입지 않는 분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와 같이 살과 피를 지닌 한 인간으로서 시험을 받으실 수 있었고, 또한 시험받는 것을 기꺼이 원하셨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시험받는 것을 거부할 수 있고 또 시험을 받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럴 수 없다. 그는 방어적이 아니라 공격적으로 시험을 치뤄야 한다. 왜 그런가?
세 가지 시험에서 불경건하거나, 위험하거나 또는 단순히 어리석은 사탄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 가지 시험에서 도덕적인 면이나 심지어 법적인 면에서 위반이나 범죄라고 부르는 것을 범하라고 유혹하는 일은 전혀 없다. 세 가지 시험의 핵심은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걷기 시작하신 길 곧 회개의 길을 충실히 걷지 말라는 충고와 제안일 따름이다. 이것은 십자가에 이르는 길과 전혀 다른 길을 따라가라는 충고와 제안이다. 만약 예수님이 그 충고를 받아들이셨다면, 도덕이나 법에 대한 그 어떤 위반과 범죄보다도 더 중대한 행위, 곧 악의 절정이었을 한 행위를 저지른 것이 되었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왜냐하면, 예수의 순종이 없었다면, 하나님께 대한 세계의 반목은 계속되었을 것이고, 그의 성실함이 없었다면, 우주의 파멸은 저지될 수 없었을 것이며, 그렇게 인간의 멸망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에 대한 첫 번째 시험은 복음서 기자들이 암시하듯이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어떤 사람도 받아본 적이 없는 시험이었고, 그래서 오직 그분만이 감당하실 수 있는 바로 그러한 시험이었다. 사탄은 사십일 간의 금식을 방금 마친 굶주린 예수님에게 다가와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사용하여 말씀으로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제안을 한다. 만약 예수님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그는 그가 지닌 하나님의 권세를 마치 자신의 생명을 구하고 보존하기 위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기술적인 도구인양 사용했을 것이다. 그로써 그가 세례를 받을 때 들어갔던 죄인의 처지를 스스로 떨쳐버렸을 것이고, 죄인들을 위해 금식하고 회개하는 자의 역할을 독단적으로 포기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충만한 능력 안에서,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금식과 회개를 중단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는 큰 죄인으로서 전적으로 자신의 생명의 구원과 보존을 위한 희망을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거는 것을 거부하였을 것이다. 그는 기꺼이 이 말씀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만 살아가고, 그러므로 계속하여 갈망하는 것을 거부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는 다른 모든 사람이 예수님 대신에, 예수님의 권세를 갖고 분명히 행했을 법한 그러한 일을 행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아서, 완벽하게 이성적이고 정상적으로 행동했을 것이다. 나중에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이성적으로 그리고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랍비여 잡수소서!”(요 4:31)라고 말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요 4:34)을 그의 양식으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자리에서 행동하시기는커녕, 곤경에 처한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었을 것이고, 그들의 일을 결코 자신의 일로 여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 시험을 물리쳤다. 그는 하나님께서 옛적에 같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을 먹이셨던 만나의 약속(신 8:3)을 신뢰하며 끝까지 순종하며 회개하고 금식하였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살기를 원했고,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죄인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이 백성의 머리와 왕으로서 살기를 원했다. 따라서 그의 결정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분 대신에 내렸을 결정과 전혀 달랐다. 그런 식으로 그가 그들을 대신하여 이루신 것은 올바른 일이었다.
사탄의 두 번째 시험은 다음과 같다. 만약 예수님이 사탄 앞에서 엎드려 절한다면, 그에게 넘어온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넘겨주겠다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그렇게 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그는 그럼으로써 그가 요한의 세례를 받았던 것을 후회하고 있고 그가 시작했던 회개를 마무리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입증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죄를 죄로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을, 세상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그것과 끝까지 싸우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그는 비할 데 없이 단순하고, 실리적이며 현실적인 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그는 악을 제거하는 문제를 버려두기로, 사실상 악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로지 이 결정적인 공리로부터만, 다시 말하면 악의 보편적인 통치의 기반 위에서 그리고 그 범주 안에서만 선을 행하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왜 그가 땅 위에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겠는가? 기독교적이며 인본주의적 원리들에 기초한 국제적인 사회를 세우려는 결심도 했을 것이며, 여기서 자유주의적이고 정통적이며, 에큐메니칼적이고 고백적인 교회도 적절한 자리를 차지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위해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무신론자가 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다만 찬탈자에게 그의 모자를 살짝 들어 인사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는 다만 신중하고 은밀하게 사탄에게 경배하기만 하면 되었다. 다만 그는 저 화려한 나라에서 사탄이 전권을 갖고 있으며, 근본적으로 모든 것은 옛날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러한 조건 아래서 사람들은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고, 예수님은 가장 큰 성공을 거두실 수 있었다. 이러한 조건 아래서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가 세워졌다면, 거기에 십자가를 위한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이 공개적으로 통치하고 사탄이 은밀하게 통치하는 이 세상에서 십자가는 세련되고 심오한 하나의 상징이 되었을 것이다. 즉 대중철학을 장식하는 도구나 또는 아주 단순하게 하나의 장식품(예컨대, 주교들의 장식품)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회피했던 것, 그러므로 그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은 것에 대한 적당한 추억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대관절 누가, 예수님 대신에, 그 제안을 거부할 정도로 어리석겠는가? 그러나 만약 예수님이 여기서 굴복했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 대신에 행해야 했고 행하길 원했던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다시, 그는 –사탄과 예수님에 의해 동시에 지배를 받는 이 세상 나라가 우리에게 아무리 경이롭더라도- 우리를 버렸을 것이고, 배반했을 것이다. 여전히 하나님과 결정적으로 화해하지 못한 세상에서 이런 위대한 영광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한 나라의 모든 상상할 수 있는 장점과 진보가 인간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예수님은 이 두 번째 시험도 마찬가지로 물리치셨다. 그는 수월한 현실주의에로의 전향을 거절하셨다. 예수님은 유일한 큰 죄인으로서 다른 모든 사람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들을 대신하여 세상의 기만적인 영광을 바라지 않고, 확실한 실패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섬기려고 하였다. 예수님은 끝까지 회개와 순종 가운데 머물고자 하셨다. 이것이 그가 우리를 위해 이루신 올바른 행동이었다.
세 번째 시험은 모든 시험 가운데 가장 놀라운 시험이다. 벌써 장소의 위엄, 곧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의 하나님의 성전의 위엄은 분명 사탄이 세상의 모든 나라를 예수님께 보여주며 주겠다고 말했던 그 높은 산의 세속적인 위엄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크다. 마찬가지로, 사탄은 보다 진지하고 능란하게 등장하며, 자신을 다윗의 시편도 인용할 줄 아는 경건한 사람으로 소개한다. 무엇보다도, 그의 제안은 ‘시험’이라는 경멸적인 용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의 이전의 시험들과는 정반대로 그는 예수님에게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이고 맹목적이며 전적인 신뢰를 나타낼 것을 요구한다. 이 신뢰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에게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그가 앞선 두 번의 시험들을 물리치기 위해 주었던 대답들에 정확히 상응하는 한 행위를 기대했을 수도 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살아가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이것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드러내게 하려고 “굉장한 기적”을 하라는 요구가 아니다. 그것은 종종 이런 식으로 해석되었지만,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뜻을 캐내기보다는 성경 속으로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는 방식이다. 사실상 본문 자체는 관중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적인 고독 가운데 있는 그가 하나님과 연결되어있는지를 마지막으로 시험하고 검증하려는 문제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고 그의 천사들을 통해 그를 지켜주실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그 확신을 입증하기 위해 성전 아래로 뛰어내려야 한다. 예수님이 정말 뛰어내렸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 시험이 예수님이 실제로 걸어가신 길과 매우 가깝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약 하나님의 뜻이라면, 예수님은 심연으로 뛰어내렸을 것이며, 십자가의 길을 가셨을 것이다”(슐라터). 그러나 만약 여기서 예수님이 뛰어내렸다면,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자신의 뜻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도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과 명령에 복종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최고의 쾌감과 만족을 위해 하나님을 시험한 셈이 된다. 그는 끊임없이 회개하는 대신에,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옳다고 여기는 대신에 하나님과 함께 의기양양하게 자신이 옳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는 신비적인 열광 속에서 실행된 최상의 경건한 행위 속에서 하나님의 주장을 자신의 주장으로 만들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는데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주장을 배반하였을 것이다. 만약 그가 가장 높은 이 마지막 시험에 굴복했다면 그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가장 큰 죄를 범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특별한 믿음의 모습을 가장하여 그는 자신에 의해서 그리고 그의 인격 안에서 죄인들이 아니라 그렇게 굳게 믿는 예수 자신을 받아들이라고 요청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 모든 거짓된 신들 중에서도 가장 거짓된 신, 곧 경건한 인간의 신이 되어달라고 강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죄인들과의 사귐을 회피했을 것이며, 그들의 대표자와 머리로 살고 행동하도록 정해진 자신의 운명을 거부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화해하지 못한 세상을 그대로 방치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우리는 앞의 두 가지 시험들에 관한 것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대관절, 예수님 대신에, 이 세 번째 시험에 빠지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가장 큰 꿈은 자기의 “종교적” 헌신, 곧 자기 영화의 극단의 형식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을 인간을 섬기는 자리에 놓고, 그에 대한 가장 완전한 믿음을 핑계로 이웃과 함께 그를 부인하는 이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일을 하지 않았다. 그는 바로 이처럼 가장 높은 종교적인 만족을 죄의 가장 높은 형태로 보고 거절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요한의 세례에 충실하였다. 언제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머물러있었다. 그는 죄를 짓지 않고 순종하였다. 그는 우리 대신에 의로운 것을, 곧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 그리고 세계와 하나님의 화해를 위해 자신의 인격 안에서 반드시 행해져야 하는 것을 하였다. 꼭 필요한 한 가지 일을 하였던 것이다.
K. Barth, Church Dogmatics Ⅳ/1, 260-64에서 발췌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