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며
츠빙글리 종교개혁의 의의
올해는 훌드리히 츠빙글리(1484-1531)의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우리 개혁교회는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에 그 기원이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츠빙글리에 대해서는 너무나 아는 바가 없다. 사람들은 종교개혁하면 루터를 떠올리고, 개혁교회의 개혁자로는 칼빈을 생각한다. 개신교 종교개혁의 초기 역사에서 츠빙글리의 중요성은 결코 논박할 수 없지만, 그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관심은 지난 세기말에야 비로소 확산되었다. 이는 츠빙글리의 명성이 당대로부터 삼중으로 손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첫째, 루터에 의해서 악마의 도구로 덧칠이 되었고, 둘째, 남부 독일과 스위스에서는 칼빈에 의해 빛을 잃었으며, 아마 가장 악영향을 미친 것은, 제2차 카펠 전쟁에서 불시에 폭력적인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에 대한 많은 연구에서 츠빙글리는 주로 루터와 대조되어 신학자보다는 좀 더 인문주의자로, 참된 영적 깊이가 부족한 사람으로, 정치와 종교의 파국적인 혼합을 옹호한 사람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는 마르부르크 대담(1529)에서 루터와 대립하여, 따라서, 적어도 간접적으로, 개신교의 분열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지난 20세기 후반의 연구에서 두 가지 요인이 결합되어 츠빙글리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그의 독보적인 공헌에 대해 공정한 평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우선 종교개혁 연구가 교파의 역사로부터 벗어났다. 이로써 츠빙글리는 다른 개혁자들의 배경으로 이해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연구될 수 있었다. 또한 츠빙글리와 스위스 도시들의 개신교 종교개혁의 독특한 측면들에 주의를 집중하는 연구서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결과 츠빙글리에 대한 중요한 재해석이 가능했고, 20세기 후반 이후 그에 관한 연구의 돌풍이 일어났다.
오늘날 스위스는 세계 최고의 부국에 속하지만, 16세기 당시는 먹고 살 것이 없어 용병무역을 통해 생계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1513년과 1515년 북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전투 현장에 글라루스 용병의 사제로 참여했던 츠빙글리는 스위스 청년들이 각각 다른 편의 용병이 되어 서로 죽이고 죽는 처참한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이 용병제를 통해 이득을 얻는 자들은 전투에 참가하여 죽거나 다치고 돌아온 청년들이 아니라 소수의 권력자들과 그와 결탁한 중세 가톨릭 교회였다. 츠빙글리는 이 경험을 통해 용병무역의 부도덕성을 깊이 깨닫고, 만약 그들이 이러한 죄된 행동을 지속한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용병제도의 모순과 문제를 지적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외침은 대중의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드디어 1518년 말, 아인지델른에서 사역하던 그는 취리히 시정부에 의해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사제로 청빙을 받고, 1519년 1월부터 마태복음을 연속으로 강해하는 것으로 개혁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루터가 자신의 신앙문제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시작하여 종교개혁에 접근했다면, 츠빙글리는 고통당하는 민족의 문제를 고민하며 종교개혁을 사회개혁과 연관시킨 개혁자였다. 이점에서 그는 단지 교리만이 아니라 삶 전체의 개혁을 목표로 “종교개혁의 두 번째 전환”, 곧 “종교개혁의 윤리적 전환”(K. 바르트)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9년은 우리에게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의미 깊은 해이기도 하다. 당시 한국교회는 고난 받는 민족과 함께 하고, 세상과 연대하며 세상에 대한 책임을 지는 교회였다. 의료, 학원, 복지 등 사회 각 분야에서 교회는 나라 잃고 신음하는 민족의 버팀목이며, 어두운 세상의 한줄기 빛이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났다. 한국사회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고, 한국교회도 세계선교사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사회양극화’, ‘격차사회’로 특징되는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기는커녕, 이 세상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창2:23)이 되지 않았는가? 개혁을 완수한 교회는 있을 수가 없고 항상 개혁되어야만 하는 교회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 종교개혁의 기본 정신이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교회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개혁되어야 한다. 츠빙글리의 개혁은 그것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측면들 때문에 특히 중요하다. 사람들을 우상들로부터 돌아서게 하는 것만이 그의 개혁의 목표는 아니었다. 그것들은 파괴되어야 한다. 츠빙글리는 내적인 변화의 외적인 표현이 없이 진정한 개혁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말했던 개혁자였다. 바로 이것이 츠빙글리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그로부터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일 것이다.
개혁교회의 창시자 츠빙글리
츠빙글리는 1484년 1월1일 스위스 동부의 빌드하우스(Wildhaus)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곳의 부유한 농민이었으며 암만(Ammann)이라고 불리는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직책을 지닌 그 지역의 지도자였다. 츠빙글리의 어린 시절에 관한 자료는 거의 없다. 그 스스로도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이러한 경향은 하나님만을 앞세우려는 것에서 비롯되는데, 이후 개혁교회 경건의 유형이 된다. 그는 자신이 뭔가 선한 일을 한다고 믿었을 때는 그것을 하나님의 역사로 느꼈고, 자신이 뭔가 실패를 하게 되면 그것은 자신이 하는 인간의 행위로 받아들였다.
츠빙글리의 부모는 츠빙글리가 교회에서 일할 수 있도록 우선 그를 스위스 베른에 있는 라틴어 학교에, 이후에는 오스트리아 비인으로 보냈다. 1502년 여름학기에 그는 스위스 바젤 대학교에 등록하였고, 1506년 인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옛 방법’에 따르는 신학교육을 받고, 그해 여름 스위스 동부 글라루스의 사제로 청빙을 받았다. 글라루스 시절 그는 ‘인문주의’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1516년 그가 바젤에서 당대 최고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를 만난 뒤에는 자극을 받고 성서 원어에 집중하였다. 그가 스위스 인문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지도적인 인물로 부상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츠빙글리가 언제부터 단순한 인문주의자로 머물지 않고 개혁자로서 첫 걸음을 내딛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1520년 7월24일 동료 미코니우스에게 보낸 한 편지는 종교개혁에 대한 인문주의적 개혁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종교개혁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종교개혁이 성공하려면 인문주의자의 교육적 통찰 그 이상, 곧 하나님의 섭리가 필요하며, 종교개혁의 과정의 주연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한다.
츠빙글리는 1519년 1월1일 취리히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강단에서 설교하는 첫 날부터 설교에서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그는 마태복음을 연속으로 강해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성서일과 본문과 매주일과 관련된 성자숭배 전통과 단절하는 것이었다. 복음의 선포가 설교의 중심이었다. 그리스도만이 진리의 원천과 구원의 유일한 길(solus Christus)이다. 다른 교부들의 신학이나 성자에 대한 전설, 교회의 전통은 뒷전으로 물러났다. 이를 위해 그는 성서본문을 그의 설교 중심에 놓고 다른 성서본문과의 연관성 속에서 주석하는 방식을 택했다. “오직 성서만”(sola scriptura)이라는 개혁교회 원칙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1519년 8월 취리히 시는 온통 흑사병에 휩싸였다. 9월에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목회자로서의 임무를 다하던 츠빙글리도 결국 이 전염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되었다. 그해 말에 가서야 겨우 몸을 회복한 츠빙글리는 병에서 회복한 실존적 경험을 담아 ‘흑사병의 노래’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sola Gratia)로 다시 생명을 선사받아 하나님의 ‘그릇’이 되었다고 고백한다.(롬 9:20이하) 이후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에만 의존하여 두려움 없이 세상의 모든 권세와 도전에 맞서 하나님만 찬양하고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는(soli Deo Gloria) 말씀을 전하기로 결심한다.
츠빙글리의 가르침에 대한 공개적 논쟁의 발단은 1522년 봄에 그의 청중들 일부가 취리히 교회의 금식규정을 위반하고 “소시지를 먹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츠빙글리의 “오직 성서만”의 설교를 행동으로 나타낸 것으로 여겼다. 츠빙글리 자신은 이 사건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금식 전통을 깨트린 자들을 변호했다. 그는 1522년 3월29일의 설교에서 이 문제를 언급하며 신학적으로 해명했다. 후에 그는 이 설교문을 “음식의 자유로운 선택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인쇄하여 발표했다. 종교개혁적 자유의 주제를 다루는 이 글은 1520년에 발간된 루터의 유명한 종교개혁 소논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라는 글에 필적할만한 글이다. 그 내용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올 수 있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신뢰는 인간이 규정한 모든 종교적인 굴레와 규제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다. 츠빙글리는 믿는다는 것은 신뢰하는 것이며,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내맡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행함의 일치는 츠빙글리에게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었다.
츠빙글리의 ‘오직 성서만’의 설교와 전통적인 종교적 실천 사이의 긴장은 계속 증가했다. 취리히 시의회는 도시의 안정을 위해 1523년 1월3일 그 달 29일에 지역의 모든 사제들이 공식논쟁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포고문을 공지했다. 거기서 그들은 츠빙글리의 출현과 함께 쟁점이 되었던 복음의 “충실하고 완전한” 설교의 문제에 관한 토론에서 츠빙글리와 그의 논적들 양쪽 모두가 “신성한 성서에 따라” 그들의 주장을 펴야 한다고 진술한다: “신성한 성서”대로 그의 주장을 논하는 자는 누구나 의회에 의해 옹호될 것이며, “참되고 신성한 성서에 근거하지 않고 자기에게 좋은 것처럼 보이는 것을 강단에서 설교하는 자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이미 공식 논쟁에 들어가기 전에 취리히 시의회는 교회의 전통을 논쟁의 논거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사전에 통보했던 것이다. 이 논쟁을 위해 츠빙글리는 서둘러 자신의 논제를 ‘67개조’로 정리해 작성했다. 이 논쟁에서 츠빙글리의 설교는 공적으로 승인되었고 시의회는 사실상 종교적인 문제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츠빙글리는 1523년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에서 인간적 정의를 규정하고 형성하는 모든 일은 언제나 하나님의 정의에 비추어 새롭게 비판적으로 점검하고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교회 개혁을 추진하면서 그저 루터처럼 명백히 비그리스도교적인 요소들만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적 근거가 없는 것은 모조리 철폐해 나갔다. 더 나아간 행동이 뒤따랐다. 사제의 결혼 허락(츠빙글리 자신의 1524년 4월 결혼을 포함해서), 성상의 제거(1524년 6월), 취리히 수도원의 해체(1524년 10월), 미사의 폐지(1525년 4월) 등등.
종교개혁에 대한 츠빙글리의 가장 중요한 공헌들 가운데 하나는 성서원어와 성서본문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강의학교’(렉토리움)을 1525년에 설립한 일이다. 후에 이곳은 ‘프로페자이’(Prophezei)라고 불렸다. 그로스뮌스터 교회로 금요일과 주일을 제외하고 일주일에 다섯 차례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 가운데는 취리히의 목회자들만이 아니라, 라틴어 학교 상급반 학생들, 또한 함께 모여 성서주석을 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성령의 임재를 간구하는 시작 기도 후에 히브리어 교사가 구약성서를 주석하였고, 그 다음은 츠빙글리가 같은 본문을 헬라어 셉투아긴타(Septuaginta)에서 주석했다. 그 뒤에는 라틴어로 주석된 의미를 독일어로 요약하여 설교자가 회중들에게 전달하기 쉽게 해주었다. 같은 시간에 그로스뮌스터 교회 앞에 위치한 프라우뮌스터에서는 신약성서본문들이 주석되었다. ‘렉토리움’의 설립은 종교개혁의 일반적 목표를 제도적으로 가시화한 것이었다. 그것은 성서에서 증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사회전체에 파급효과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츠빙글리의 가르침 가운데 루터파는 물론 개혁파에게도 가장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은 성찬론이다. 그의 성찬론은 단순히 ‘기념하는 성찬’이라고 알려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 빵과 포도주에는 그리스도가 임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루터는 성찬에 그리스도의 현실적인 임재를 부정하는 것은 악마의 공격으로 보았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분명히 다른 점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실제로 성찬식에 임재함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현존하지 않는 성찬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성례적이며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것입니다.” 1) 츠빙글리의 성찬론은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그의 이해의 결과물이다. 하나님의 영은 삼위일체의 영이시며, 또한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바로 그 영은 일정한 예식이나 장소에 제한되지 않고 세상을 가득 채우고 계신다. 이는 “유한은 무한을 포용할 수 없다”(finitum non est capax infiniti)는 개혁파 신학사상의 전형을 담아내는 생각이다.
츠빙글리는 우선 취리히에서 철저한 개혁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의 눈은 스위스 전체와 그 주변세계를 향해 있었다. 그는 신앙의 옹호를 위해 외교동맹을 생각했다. 마침 합스부르크가에 반대하는 개혁의 통일전선을 생각했던 필립 백작은 루터와 츠빙글리 사이에 상징적인 연합이 일어날 필요가 있다고 인지하고 마부르크 담화(1529년 10월1-4일)를 개최했다. 그러나 이 담화는 단순히 둘 사이에 심각한 차이를 드러내고 말았다. 불일치는 성찬론에서 비롯되었다. 츠빙글리와 루터의 성찬논쟁은 신학적-정치적 견지에서 모두 중요하다. 신학적 견지에서 이 논쟁은 ‘성서적 명료성’의 원리에 관해 심각한 의문을 야기시켰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이것은 나의 몸이다”는 말씀의 의미(루터는 문자적으로, 츠빙글리는 비유적으로)와, “하나님 우편”이라는 말씀의 의미(루터는 비유적으로, 츠빙글리는 문자적으로)에 관해 의견의 일치에 이를 수 없었다. 정치적 견지에서는, 이 논쟁의 결과로 종교개혁의 복음적 두 진영이 영구히 분열되었다.
츠빙글리의 지속적인 영향과 전망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바젤, 베른, 상트 갈렌 등 스위스의 다른 도시들에서도 관철되었다. 남부 독일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나, 정치·사회영역에서의 적극적인 협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스위스의 시골지역(우리, 슈비츠, 운터발텐)과 루체른, 추크, 프리부르크 같은 도시들의 전통적 주민만 종교개혁을 거부·저지했다. 그 결과 스위스에서도 지역과 주민을 이리저리 갈라놓는 분열이 시작되었고, 끝내 내전으로 귀결되었다. 츠빙글리는 다시 종군 설교자가 되어 전쟁터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1차 카펠 전투가 발발했고, 곧이어 일어난 2차 카펠 전투에서 츠빙글리는 전사했다. 1531년의 일이었다. 그의 시신은 네 조각으로 절단되었고, 갓 잡은 돼지조각과 함께 불태워졌다. 이는 아무도 그 재로부터 그를 기릴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츠빙글리가 평생 추구했던 일은 남았다. 츠빙글리의 공적인 설교, 수많은 출판물들, 그리고 활발한 서신교류는 동시대인들에게 주목할 만한 영향을 행사했다. 츠빙글리 사후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아 프랑스인 칼빈은 개혁 도시 베른의 보호 아래 제네바에서 개혁파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진행하게 된다. 칼빈은 츠빙글리의 후계자 하인리히 불링거와 함께 1549년 「티구리누스 합의」를 통해 유럽의 모든 개혁파 교회 연합의 토대를 놓았다. 칼빈의 그 어떤 신학적 사유도 츠빙글리가 다루지 않은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역사적으로만이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츠빙글리가 개혁교회의 창시자이다. 파렐, 비렛, 부쳐와 불링거 등 기라성 같은 개혁파 지도자들 모두 츠빙글리의 영향을 받았던 신학자들이다. 그 이후 진행된 개혁교회의 역사와 신학에서도 그의 영향은 지속된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개혁교회 신앙문서가 해당된다. 예컨대, 불링거의 「제2스위스 신앙고백」, 「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 17세기의 계약신학을 위한 초안이 이에 포함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20세기의 칼 바르트의 신학에서 보다 철저한 츠빙글리의 신학적 결단을 볼 수 있다. 오늘날까지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1934년의 「바르멘 신앙선언」은 츠빙글리의 기본적 내용을 당시 상황에 맞게 재적용한 것이다. 하나님 예배와 우상숭배 사이에서 분명한 구별을 촉구한 츠빙글리의 예언자적 외침이 저 고백문서의 근본적 성격을 규정짓고 있다.
한국교회는 지난 10년 새 칼빈 탄생 500주년(2009)과 종교개혁 500주년(2017)이라는 교회개혁을 위한 천금 같은 기회를 가졌었다. 많은 기념행사가 벌어졌고 수많은 연구서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기저기서 개혁에 대한 뜨거운 결의와 굳은 다짐도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한국교회는 그러한 일들을 때에 따라 의당 치러야만 하는 의례적인 행사로만 여겼다. 그러한 일들은 단지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고전 13:1)에 불과했다. 시도 때도 없이 한국교회 이곳저곳에서 끝없이 불거져 나오는 불의하고 무도한 일들이 그렇다고 말해준다. 이는 주님께서 저주하신 “회칠한 무덤”(마 23:27-28)같은 위선적인 행위이다. 개혁자들을 기리며 그들의 뜻과 가르침을 따르기로 다짐했다면, 그들이 가리킨 것을 함께 바라보고, 그들이 내렸던 결단을 우리의 것을 삼아 단호하게 분명하고 돌이킬 수 없는 운동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이것은 맘몬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삶의 태도와 자세와 행동이다. 세상의 것들이 유혹하고, 편안하고 익숙한 길을 강요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는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낯설고 거슬리는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것을 한갓 내면적, 한갓 영적, 한갓 생각만이 아니라, 우리 몸 전체를 “거룩한 산 제물로”(롬 12:1)바치며 해내야 한다.
그러므로 츠빙글리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그를 기리고 그에게서 배우려고 한다면, 그가 전하고 행했던 대로 일상의 삶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고자 노력해야 한다. 츠빙글리가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언제나 갈등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온 세상과의 전쟁을 의미할 수도 있다. 따라서 츠빙글리에게 배운다는 것은 그리스도만이 세상의 유일한 주시라고 고백하는 용기를 갖고 “인도자와 대장” 2) 되시는 그분을 위한 선한 싸움을 싸울 채비를 갖추는 것이며,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에 대해서는 선한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츠빙글리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며 그에게서 배우고 싶은 것은 ‘프로페자이’, 성서연구, 설교준비 모임이다. 우리 주변에는 이 모임을 따라 매주 모여 함께 성서를 읽고 주석하며 설교를 준비하는 목회자 모임들이 있다. 필자는 지난 칼빈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며 칼빈의 ‘제네바 목회자회’를 이런저런 형식으로 여기저기서 말했던 적이 있다. 이 제네바 목회자회는 프로페자이와 약간의 형식을 달리하는 모임으로 매주 금요일에만 모여서, 오전에는 제네바 교회에서 문제되는 신학 교리를 논하고, 오후에는 주일에 설교할 성서본문을 주석하고 함께 설교를 준비했다. 주 5일 모였던 프로페자이와 달리 주 1회 모인 제네바 목회자회가 그래도 우리 형편에 맞는 것 같아 우리도 이러한 모임을 가져보자고 외쳤던 것이다. 갈수록 교회의 상황은 어려워지고, 세상의 도전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이럴 때, 지역의 목회자들이 함께 모여 신학을 논하고 성서를 주석하며 설교를 준비하는 모임이 많아진다면, 우리는 개혁자가 원했던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훌트라이히 츠빙글리/임걸 옮김, 『츠빙글리 저작 선집』Ⅳ(서울: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5), 316, 318.
2)Huldreich Zwingli, Huldrych Zwingli Schriften, Bd.Ⅱ, hrsg. von Thomas Brunnschweiler, Samuel Lutz, (Zürich:TVZ, 1995), S.59 페터 오피츠/정미현 옮김, 『울리히 츠빙글리』(서울: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7), 137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