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 목사(목회와신학연구소 소장)
우리의 인생은 생명에서 죽음에 이르는 여정을 살아간다. 처음엔 젊으나 차츰 늙어가고 마지막에는 결국 죽어서 어느 공동묘지에 묻히거나 화장터에서 한 줌 재로 사라져버리는 이것이 우리의 인생여정이다. 하나님의 여정은 그와 같지 않다. 부활절의 역사는 죽음과 무덤으로부터 시작하고, 그 이후 ‘생명’이 온다. 이제는 전진이다. 되돌아갈 수 없는 일방통로를 통해서 생명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전진한다. 이것이 바로 부활절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일이다.
예수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다(롬 4:25). 곧바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예수의 이야기는 끔찍한 수난과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예수가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이 부활 사건은 제자들의 눈에 가려져 있던 십자가의 의미를 밝혀주고, 베일에 가려있던 그의 존재와 행위, 그가 성취한 모든 것,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상황의 완전한 변화를 드러내 보여주었다.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한 이 부활의 경험을 운명의 힘, 죽음의 세력은 깨졌다는 증명과 약속으로 이해했다. 바울은 이것을 핵심적으로 인상 깊게 요약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부활하신 그는 오늘, 과거에 존재하고 행하셨던 모든 것 속에서, 그가 온 세상을 위해 발휘하신 권능 속에서 살아 계신다. 이것이 정확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는 말씀의 의미이다. 또한 이 말씀은 우리는 오늘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성령의” 능력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말과 같다(롬 8:2).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살아 계시며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고백한다. 그는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곧 “위에”(골 3:1) 계신다.
그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마 28:20). 그러나 우리는 안타깝게도 그가 약속하신 대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와 함께 하는지를 알 수가 없다. 궁극적인 것은 그 이전의 영역에 근거한 인식방법으로는 분명하게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이것은 신약성경의 부활 기사가 어지러울 정도로 진술의 다양성이 있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부활의 증인들은 그들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어떤 놀라운 일을 경험했고, 그래서 그들 각자는 그 일에 대하여 어떤 파편만을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파편들은 우리에게 인간의 오성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역사를 증언하기에 충분하다.
그는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칼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는 세 가지 형식이 있다. 첫째, 그는 부활을 통해 다시 오셨다. 이 첫 번째 형식의 다시 오심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그가 승천하시는 것으로 끝났다(눅 24:51, 행 1:9). 그러나 그는 제자들에게 “보혜사”를 약속하시며, 그가 영원토록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며, 자신이 그들을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4:16, 16:7).
둘째, 성령을 통한 그의 다시 오심이다. 사도행전은 약속하신 보혜사의 도래를 증언한다(행 2:2이하). 이는 성령을 통한 그의 다시 오심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의 특별한 형식, 즉 그의 첫 번째 다시 오심인 부활과 그리스도인들이 ‘마라나타’(고전 16:22)라고 기도하며 애타게 기다리는 그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다시 오심 사이에 있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의 그의 현존과 행동의 특별한 형식이다. 그의 다시 오심은 단지 첫 번째와 세 번째 마지막 형식에서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의 영역 안에서 이 두 번째이자 중간의 형식에서도 일어난다. 이 두 번째 형식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전에 계셨고 앞으로도 계실 분으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중간시간 동안 어떤 대리자들, 대역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성령을 통한 그의 현재와 활동에서 어떤 부재나 공백이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아계신 주님이 직접 그의 성령을 통해 세상 가운데 전적으로 현존하고 활동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그가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간에 세상의 주로서 그들과 마주하고 그들을 위해 활동하시는 중보자와 화해자와 대면하게 된다.
성령을 통한 그의 다시 오심의 이 두 번째 형식은 다른 두 형식에 못지않은 중요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또한 세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 성령 안에서의 그의 다시 오심은 부활 후에 그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것과 똑같은 그의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자기 계시이다. 그는 지금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신다(골 3:1).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권한과 능력과 은총으로 만물을 관리하고 지배할 권한을 갖고 있고 또 전적으로 행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가 성령으로 다시 오셔서 통치하시는 이 중간시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재나 공백의 시간이 아니라,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충만한 권능과 은총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다스리시는 시간과 같다.
2) 성령을 통한 다시 오심의 이 두 번째 형식에서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과 사람의 아들이며, 중보자로 계신다. 「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 질문 47항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관련하여 이렇게 질문한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대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이 물음에 답변 47항은,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요 또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지금 사람의 본성으로는 이 땅 위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적 본성과 위엄과 은총과 영으로는 결코 우리에게서 떠나 계시지 않습니다”고 답한다.
아마 대부분 그리스도의 현재를 육신으로는 하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고,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가 보혜사 “성령의 약속” 안에서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은 그의 인간성은 하늘에 남겨두고 단지 순수한 신성의 능력 안에서만 오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의 한계를 넘어 그의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 그의 신적 존재와 인간적 존재의 일치 안에서 전에 그들 가운데 살아 계셨고, 골고다에서 죽었던 바로 그분으로서 오셨듯이, 그는 약속하신 성령 안에서도 그와 같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 다만 그의 다시 오심의 형식만 다를 뿐이다.
3) 이 두 번째 형식 안에서의 그의 활동은 첫 번째 형식에서 행해졌고, 또한 마지막 세 번째 형식에서 행해질 그것과 질적으로 동등한 활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현재와 관련하여 그의 현재가 더이상 부활절의 시간이 아니고 아직 마지막의 시간도 아니라, 단지 성령의 시간일 뿐이라고 아쉬워하고 탄식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고 살아가는 이 중간시간은 부활과 마지막 때에 못지않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우리의 중보자와 화해자로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부활절이 몇 주 앞으로 다가왔다. 부활절은 예수의 생명이 죽음에서 벗어난 생명이며, 예수의 생명과 존재론적 관련 속에 있는 우리의 생명도 이 죽음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만천하에 선언한다. 코로나19가 온 세계를 공포와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제 확진자 수가 감소추세에 들어가고는 있지만,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른 것 같다. 우리는 코로나19 같은 미생물에 의해서도 생명의 위협을 받는 참으로 나약하고 미미한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 안에 있는 자들이다. 이 부활의 능력은 우리를 붙들고, 그 결정의 영향권 안에 놓고, 바로 그렇게 우리를 모든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방하는 능력이다. 다시 살아나신 그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심을 믿고, 사도 바울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소망 가운데 이 어려운 시기를 보내기를 기원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 8:35, 38-39).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