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방언과 삶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기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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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2:1-21

성령강림주일

윤성민 목사(연구위원, 강남대학교)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충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한국교회는 방언과 은사를 강조한 성령충만함을 강조했습니다. 성령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열매를 사모했지만, 한국교회가 뜨거운 만큼이나 기독교인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는 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헨리 나우엔은 성령 안에서 산다는 것은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적개심에서 따뜻한 환대로, 환상에서 기도로 인도하시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인은 고독 가운데 제자의 삶을 살 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고독한 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산다는 것은 정의롭고 공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산다는 것은 때로는 고난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고독을 즐기고, 고독 가운데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고독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곧 내 마음에 그분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기독교인은 너무나도 시끄럽습니다. 교회 안에서 말로 상처를 주고 사회 안에서는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원산지가 되었습니다. 다시금 성령충만함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할 때입니다. 헨리 나우엔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이웃에 대한 적개심에서 따뜻한 환대로 변화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인은 낯선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을 우리의 삶에 맞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삶은 내 마음이 가난하고 타인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가 없어야 합니다.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면, 내 생각에 타인에 대한 두려움이나, 자신이 만들어 낸 염려 속에 타인을 바라본다면 적개심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특히, 코로나 사태 때에 교회에서 마스크를 만들어서 무료로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교회와 수요 예배 대신에 노숙자에게 따뜻한 먹을거리 등을 나누어 준 분들은 분명 성령의 사람입니다. 삶 속에 따뜻한 환대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간혹 혼란스러운 것은 교회에서 성령충만하다는 사람이 자기주장이 너무나 강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우선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야 합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늘 묵상하고, 그 가운데 마음에 들려오는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삶을 삽니다. 성령충만함을 받았다면서 거만한 사람들을 보면 자기의 의지와 계획을 주님의 음성으로 오역해서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분쟁과 다툼만 일어납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성령충만함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고 기독교인의 삶을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초대교회에서 방언을 하니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이 교회의 언어로 이야기해도 세상은 전혀 놀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걱정할 때가 많습니다. 코로나 19라는 초유의 사태에서 교회는 방역 논쟁에만 머물렀습니다. 삶에서 성령충만함이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놀랄만한 방언이 나오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방언으로 세상에 나아가야 합니다. 이전과는 다른 교회의 모습과 기독교인의 삶으로 세상을 놀라게 해야 합니다. 영국의 초등학교 선생님인 젠 포올스는 코로나 사태 때문에 휴교하니까 가정 형편이 안 좋은 제자들을 위해서 점심을 배달합니다. 매일 18kg의 짐을 지고 8km를 걸어서 점심을 제자들의 집 앞에 놓고 옵니다. 그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선생님입니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 때 그는 다른 삶과 다른 언어로 제자에게 사랑을 보여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언어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 앞에 점심을 놓고 학생들이 잘 있는지를 눈으로 보고 인사하는 사랑의 행함이 있는 몸 인사였습니다. 이 뉴스에 전 세계 사람이 감동받고 놀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과연 우리는 어떤 언어로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놀라게 합니까?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는 성령강림절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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