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26. 성령강림 후 여덟째주일
사 32:1-4.16-18, 계 11:15-19, 눅 22:24-30
서재경 목사(한민교회)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이른바 마지막 만찬입니다.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주시면서 예수님의 몸과 피로 새 언약을 세우셨지요. 십자가 고난이 예고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나를 넘겨줄 사람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 중에 배반자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비장하고 긴장된 순간입니다. 그런데 그때 제자들은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예수님을 넘겨 줄 것인지 가리자는 것일까요? 그래서 예수님을 넘기지 못하게 막자는 얘기일까요? 아닙니다. 제자들이 다툰 것은, 그들 중에 누가 더 큰 사람이냐는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누가 더 높으냐, 누가 더 크냐는 다툼입니다. 자리다툼입니다.
이스라엘은 때가 이르면, 메시아가 보좌에 앉아 새롭게 통치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때 시련을 견디어낸 사람들도 메시아와 함께 다스릴 것이라고 믿었지요. 일곱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면 주님께서 큰 권세를 잡고 다스리기 시작할 것이라는 요한계시록의 비전(계11:1)도 그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함께 시련을 견딘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주리라고 하셨지요. 하나님 나라의 밥상에서 먹고 마시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눅 22:29-30)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 다스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 나라의 왕권은 어떤 것일까요? 세상에서 왕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백성에게 권세를 부립니다. 그렇게 군림하고 부리면서도 ‘은인’처럼 행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세상 나라와 다르듯이, 하나님 나라의 왕권도 세상의 왕권과는 다르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통치와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전혀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너희도’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어떻게 다르다는 말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달라야 한다는 말일까요?
“너희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하고, 또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26절) 이 세상에서는 큰 사람이 지배하지요.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다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어린 사람이 가장 크다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 세상에서는 ‘통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섬김’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밥상에 앉아 있는 사람을 크다고 하지만, 너희 중에는 시중을 드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섬기는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입니다. 작은 사람을 무시하는 것, 섬기는 사람을 작다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멸시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일찍이 이사야는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왕을 보여주었습니다. 백성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게 하는 왕입니다.(사 32:18) 백성을 공의와 공평으로 다스리는 통치자지요.(1절) 백성은 왕을 광풍과 폭우를 피하는 곳, 마른 땅을 흐르는 냇물, 사막에 있는 큰 바위 그늘처럼 생각하고, 평화롭게 삽니다. 참 좋은 왕이지요. 그런데 어떤 왕이 이런 훌륭한 왕이 될 수 있을까요? 강력한 힘을 가져야 할까요? 신묘한 지혜가 필요할까요?
이사야는 백성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게 하는 왕이 어떤 왕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백성을 돌보는 통치자의 눈이 멀지 않을 것이며, 백성의 요구를 듣는 통치자의 귀가 막히지 않을 것이다.” 3절의 말씀입니다.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왕은 백성을 보는 눈이 열려 있고, 백성에게 듣는 귀가 열린 왕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살피고 헤아리고 공감하고 배려할 줄 아는 왕, 그런 통치자입니다. 백성의 자리에 설 수 있어야 하지요. 이렇게 백성을 보고 백성에게 듣는 것을 무엇이라 할까요? ‘섬김’입니다. 다스리는 자는 먼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