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의 선포
에베하르트 부쉬 (괴팅엔대학교)
칼빈은 영광이라는 말과 유사한 개념들로 광채, 빛남, 명성, 기쁨, 숭고, 평화, 행복과 아름다움이라는 용어들을 사용한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세 차원을 갖고 있다.
1. 하나님의 하늘 영광
이 말은 칼빈이 직접 한 표현이다(『기독교강요』 IV. 5.17).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은 “그가 어떤 특수한 장소에 갇히신 것이 아니라 만물에 편만하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우둔한 지성은 그의 영광을 달리 이해하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영광과 존엄보다 더 높고 더 충만한 하늘이라는 말로 우리에게 그의 영광을 표명하신다”(III. 20.40)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영광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속한다. 하나님이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하늘의 의의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현재에 달려 있다. 만약 그가 부재하시다면, “하늘은 아득한 곳에 있다”. 만약 그의 영광이 빛난다면, 거기에 하늘이 있다.
그러므로 그의 영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세상 저편에 위치시켜서는 안 된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지시하는 수많은 표시들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가 눈을 어디로 돌리든지 이 세계에는 적어도 하나님의 영광의 섬광이 빛나지 않는 곳은 하나도 없다”(I.5.1). 특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에게서 창조주는 “마치 거울에 비치듯이”(II.12.6) 그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외적인 표시들을 통하여 빛을 발하더라도, 그것은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I.15.3).
지금 당장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단지 간접적으로만 인지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좀 더 명확하게 그것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죄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뛰어난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 예속되어야 한다”(IV.5.17). 그러나 우리가 세상적인 것들의 광채를 마음에 둔다면, “하나님의 영광의 거울로 창조된 세계는 그 자체가 그 자신의 창조자가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하나님이 자연이다”(I. 5.5). 그리고 다음의 일이 일어날 것이다: “세계의 광경이 우리의 눈앞에 크게 나타나는 한, 그것은 우리의 시선을 가로막을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은 암흑 속에서처럼 빛을 잃게 될 것이다”(디도서 강해 2,13; CO 52,424).
2. 중보자의 영광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 그의 유일하신 아들이신 우리의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의 하나님”이다(I.13.10). 그의 신성을 가리키는 것이 영광이다. 그러나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신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그들의 죄 때문에 그것을 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 나타날 것이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라는 말을 듣는다면, 아버지의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날 때까지 너의 눈에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왜냐하면 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밝히는 유일한 빛일지라도, 단지 이 광채 안에서만 그 빛은 우리에게 도달하기 때문이다”(히브리서 강해 1,3, CO 55,12).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 나타나셔서 두려운 영광의 보좌를 은혜의 보좌로 변화시켜 주시기까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중보자 없이 대면하는 것은 우리에게 심히 무서운 일이다(III.20.17).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영광은 결속되어 있다. “영광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서 그것이 빛을 발하는 것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그가 그의 선하심 가운데서 자신이 영광스럽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보다 그에게 더 본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에베소서 강해 1,11; CO 51,152). 그는 “약함 가운데 있는 우리를 돕기 위해 오실 때 가장 영광스럽게 그의 능력을 나타내신다(골로새서 강해 1,11; CO 52,82).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이와 같이 보이게 될 때 우리가 그것을 참으로 보게 될 까? 칼빈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신성의 확실한 증거인 영광을 지각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광이 모든 사람에게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맹목 때문에 무시된 채로 있다. 다만 성령에 의해서 눈을 뜬 사람들만이 그의 영광의 발현을 알아차린다”(요한복음 강해 1,14; CO 47,15).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는 저마다 자기 멋대로 소용할 수 있는 계시를 양산하지 않는다. 성령에 의해서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영광에 열려져 있고, 그런 식으로 우리는 그것을 그의 미래의 계시의 약속의 형식 아래서 깨닫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믿음은 그것이 살아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영원한 구원에 대한 소망을 불가분리의 동반자로서 그 곁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III. 2.42). 우리는 소망을 믿음에서 떼어놓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영광의 소망”(골로새서 강해 1,27; CO 52,97)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음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정하신 미래의 영광의 광채를 인식한다”(로마서 강해 5,2; CO 49, 89f.). 이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에게 장차 올 영광의 소망을 주신다. (2) 이 영광은 이미 복음 안에서 표명된다. (3) 이 영광은 기쁨의 원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기대된 계시 안에서, 그것은 “그가 택하신 모든 자들이 그것에 참여하도록, 모든 방향에서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디도서 강해 2,13; CO 52, 424). 우리에게 허락된 이 참여는 순전히 은혜로 인한 것이다(III. 21.7). “하늘 영광의 소망이 지상의 깨어지기 쉬운 그릇 안에 담겨질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이다”(골로새서 강해 1,27; CO 52,97). “우리 자신만을 바라보면, 지금까지 우리의 구원이 소망 가운데 감춰져 있지만,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복된 영생과 영광을 소유하고 있다”(에베소서 강해 2,6; CO 51,164).
두 제안들이 정당하다. “복음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정하신 미래의 영광의 광채를 인식한다.” 그리고 또 “하나님 나라에는 영광이 가득하고 또 그것은 옳은 말이지만, 그것은 아직도 우리의 지각에서 아주 멀고, 또 희미한 것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날이 와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기까지는 그런 상태가 계속된다”(III. 25.10).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과 함께 그 날을 향해 나아간다(마태복음 강해 6,13; CO 45,203). 우리는 아직 곤경 속에서 살고 있다. 단지 그때 “주께서 자신의 백성을 치욕으로부터 영광으로 옮겨주신다”(III. 18.4). 기다리는 동안, 길을 잃어버리지 말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그의 의로운 의지에 집중하자.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는 나타나시면서 세계의 짙은 안개를 없애실 것이며, 그래서 아무것도 그의 영광의 광채를 흐리게 할 수 없게 하실 것이다”(디도서 강해 2,13; CO 52,141). 그때에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에 대한 찬양”이 울려 퍼질 것이다(에베소서 강해 1,5; CO 51, 149). “우리가 이제 더 이상 그의 긍휼을 받기만 하는 자들이 아닐 그 때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서 최고로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에베소서 강해 1,11; CO 51,152). 이 목표에 이를 때, 하나님께서 중심이 되실 것이지만, 그러나 그의 피조물들이 없이는 홀로 그렇게 되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는 그들을 영접하실 것이며 그들을 자신에게로 이끄실 것이다. 그때에 그들은 평화와 휴식을 얻게 될 것이다. “신자들의 영혼은 힘든 싸움과 노동을 마친 후에 약속된 영광을 누리는 기쁨과 함께 기다리던 안식에 들어가게 된다”(III. 25.6).